청장관전서 제22권 / 편서잡고 2(編書雜稿二) 송사전(宋史筌) 요열전(遼列傳)
청장관전서 제22권 / 편서잡고 2(編書雜稿二) 송사전(宋史筌) 요열전(遼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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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22권 / 편서잡고 2(編書雜稿二)
송사전(宋史筌) 요열전(遼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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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경(耶律璟)의 어렸을 적 이름은 술률(述律)이니 덕광(德光)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그의 선조는 선비족(鮮卑族)으로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퇴되어 세 부족으로 나누어졌는데 거란(契丹)은 그 중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 이후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대하씨(大賀氏)라 불렀고 그 후에 다시 요연씨(遙輦氏)로 변경하였는데, 해락(楷落)이라는 이가 처음으로 왕이라 일컬었으며 흠덕(欽德)에 이르러서는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이 되었다. 광계(光啓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 중엽에 유인공(劉仁恭)이 자주 전쟁을 하여 그 뒤로 점점 쇠약하여졌는데, 질랄부(迭剌部)의 우두머리였던 열리(涅里)의 후예인 이리근(夷离菫) 아보기(阿保機)가 거란의 모든 부락을 다 차지하였는데 이리근이란 군마(軍馬)를 통솔하는 큰 벼슬 이름이다. 요연씨가 끝내 멸망하니 아보기가 이름을 고쳐 억(億)이라 하였다. 어릴 적 이름은 철리지(啜里只)이고 호는 세리씨(世里氏)라 하였으니, 세리가 곧 야율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천우(天祐 후당(後唐) 애제(哀帝)의 연호) 정묘년(907, 요 태조(遼太祖) 1), 황제라 자칭하였고 그 뒤 천성(天成 후당 명종(明宗)의 연호) 병술년(926, 요 태종 1)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5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20년 만이었다. 연호를 신책(神冊)ㆍ천찬(天贊)ㆍ천현(天顯)이라 고쳤으며 시호(詩號)를 신열천황제(神烈天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 묘호(墓號)를 조릉(祖陵)이라 하였다.
둘째 아들 덕광(德光)이 위에 오르니, 덕광의 어렸을 적 이름은 요골(堯骨)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청태(淸泰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 병신년(936, 요 태종 11), 석경당(石敬瑭)을 책립(冊立)하여 진제(晉帝)로 삼았다.
천복(天福 후당 명종의 연호) 무술년(938, 요 태종 1), 진 나라가 유주(幽州)ㆍ계주(薊州) 등 16주를 떼어주었다.
개운(開運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연호) 병오년(946, 고려 정종 1), 진(晉)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 이름을 대요(大遼)라 하였으며, 얼마 후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46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21년 만이었다. 연호를 회동(會同)ㆍ대동(大同)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혜문황제(惠文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 묘호(墓號)를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형(兄)의 아들 완(阮)이 위에 오르니, 완의 어릴 적 이름은 올욕(兀欲)이며 인황왕(人皇王)인 배(倍)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후주(後周) 광순(廣順 후주(後周) 태조(太祖)의 연호) 신해년(951, 고려 광종 2), 찰할(察割)이 완을 시해(弑害)하니 향년이 34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5년 만이었다. 연호를 천록(天祿)이라 고치고 시호를 장헌황제(莊憲皇帝)라 하고 묘호를 세종(世宗), 묘호를 현릉(顯陵)이라 하였는데, 사실이 《당서(唐書)》ㆍ《오대사(五代史)》에 적혀 있다. 완이 시해를 당하였으므로 경(璟)이 수안왕(壽安王)으로 위에 올라 조회할 적에 한(漢)의 예(禮)를 사용하였다.
건륭(建隆 송 태조(宋太祖)의 연호) 원년(960, 광종 11), 송 나라 군대가 북한(北漢)의 석주(石州)를 포위하므로 경이 아랄(阿剌)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건덕(乾德 송 태조의 연호) 2년(969, 광종 15), 조빈(曹彬)이 석주를 포위하므로 경이 달열(撻烈)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으나, 빈이 격퇴시켜 도망가게 하였다.
개보(開寶 송 태조의 연호) 2년(969, 광종 20), 측근의 신하인 소가(小哥) 등이 경이 몹시 취한 틈을 타서 회주(懷州)에서 시해하였다. 경이 술을 즐기고 사냥을 좋아하였으며 살생(殺生)을 즐겨 살을 잘게 썰며 시체를 잘게 써는 등 형벌이 문란하여 국인(國人)들이 원망하고 따르지 않았다. 향년이 39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19년 만이었다. 연호를 응력(應曆)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경정황제(敬正皇帝)라 하고 묘호를 목종(穆宗)이라 하였으며 회릉(懷陵)에 부장(附葬)하였다.
둘째 아들 현(賢)이 위에 오르니 현의 자는 현녕(賢寧)이요 어렸을 적 자는 명의(明扆)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겨우 네 살 되던 해 찰할의 난을 만났는데 경이 그를 양육하여 아들을 삼았더니 경이 시해를 당함에 이르러 갑기(甲騎)를 거느리고 회주에 와서 위에 올랐으며, 상서령(尙書令) 소사온(蕭思溫)의 연연(燕燕)을 들여보내게 하여 왕후로 삼았다. 현이 풍질(風疾)에 걸렸으므로 연연이 국사(國事)를 결정하였다.
황제가 친히 한(漢) 나라 북방을 정벌하므로 현이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게 하니 이계균(李繼筠)이 역습으로 반격하여 대파시켰다.
6년, 반역의 무리인 소가(小哥) 등을 체포하여 사형시켰다.
7년, 황제가 처음으로 조서(詔書)를 가진 사신을 보내니 현이 야율창(耶律昌)을 보내어 송 나라에 들어와 조회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이 교통하였으며 중 소민(昭敏)을 승니도총관(僧尼都摠管)으로 삼고 시중(侍中)을 더 겸하게 하였다.
8년, 탁주 자사(𣵠州刺史) 야율종(耶律琮)이 웅주(雄州)의 지방 장관 손전흥(孫全興)에게 편지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구하니, 황제가 명을 내려 허락하게 하자 현이 사신을 보내어 화해하게 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황제가 반미(潘美)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북한(北漢)을 정벌하게 하니 현이 사신을 보내어 군대를 일으킨 까닭을 묻게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하동(河東)이 명령을 거역하니 죄를 묻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만일 북한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화친한 언약을 옛날같이 지킬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뿐이다.” 하고 황제가 친히 북한을 정벌하기 위하여 진주(鎭州)에 군대를 주둔시키니, 현이 야율사(耶律沙) 등을 보내어 지원하게 하였으나 전쟁의 상황이 불리하여 죽고 다친 자가 많았었다.
황제가 북한의 왕 유계원(劉繼元)의 항복을 받고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를 취하고자 드디어 현이 야율휴가(耶律休哥)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자, 송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황제는 노거(驢車)를 타고 도망하였다. 현이 한광사(韓匡嗣)를 보내어 진주(鎭州)로 쳐들어가게 하였으나 도검할(都鈐轄)인 유정한(劉廷翰) 등이 그들을 크게 격파시켜 버렸다. 남원 추밀사(南院樞密使) 곽습(郭襲)이 사냥하는 것을 간하므로 가상히 여겨 그 말을 받아들였다.
5년, 소돌이(蕭咄李) 등이 안문(贗門)으로 쳐들어갔으나 대주 자사(大州刺史)인 양업(楊業)이 그들을 크게 격파시키니 현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가서 와교관(瓦橋關)을 포위하였으며, 휴가는 물을 건너서 전투를 하여 송 나라 군대를 크게 대패시키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방어하므로 현이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와서 휴가를 우월(于越)로 삼았는데 우월이란 아주 귀한 관직이다. 휴가는 지모가 뛰어나 병사들에게 경솔하게 송 나라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6년, 상경(上京)의 한 나라 군대가 협박으로 희은(喜隱)의 아들 유예수(留禮壽)를 왕으로 세우려 하니. 유수(留守)인 서실(徐室)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나 뒤에 희은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희은은 현의 종족으로 모반하였다가 잡혀서 감금당한 자였다.
7년, 현이 만성(滿城)에 쳐들어갔으나 패배하고 돌아왔다가 초산(焦山)에서 죽었다. 현이 사람을 임용하면 의심하지 않고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는 반드시 벌을 주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漢) 나라를 도와 주었기 때문에 군대는 격파당하여 많은 장수를 죽게 하였다. 향년이 35세이고 위에 있은 지 14년 만이었다. 연호를 보령(保寧)ㆍ건형(乾亨)이라 고치고 시호를 강정황제(康靖皇帝)라 하고 묘호를 경종(景宗), 묘호를 건릉(乾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융서(隆緖)가 위에 오르니 융서의 어릴 적 자는 문수노(文殊奴)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으로 봉하여졌는데 글씨와 그림과 음률을 잘했으며 시도 능하고 활쏘기도 잘하였다. 위에 오른 나이가 스무 살이므로 소후(蕭后)가 정사를 듣고 결단하였다.
8년, 국호를 다시 거란이라 하고 포령(蒲領)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삼경(三京)과 여러 곳에 부모가 있으면서 호적을 따로 하여 동거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이웃에서 염탐하고 서로 살피도록 하여 연대 책임을 지게 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사람과 3대(代)가 함께 사는 사람은 문려(門閭)를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사형이 이미 확정되고 판결이 정해진 자 중 원통함이 있는 자는 대(臺)에 나아가 하소연하게 하였다.
옹희(雍熙 송 태종의 연호) 2년(985, 고려 성종 4), 고려의 도로가 습(濕)하다 하여 여진(女眞)을 먼저 정벌하게 하였다.
3년, 서하(西夏)의 이계천(李繼遷)이 귀순하므로 그를 정난절도사(靖難節度使)로 삼았다. 황제가 조빈(曹彬)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안문(鴈門)으로 나아가니 융서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으면서 먼저 휴가 등을 보내어 여러 번 싸워 격파하자, 융서가 승리함을 기회로 대주(代州)를 침범하려 하니 장제현(張齊賢)이 그들을 격파시켜 물리쳤다.
단공(端拱 송태종의 연호) 원년(988, 성종 7), 융서가 연달아 만성(滿城)의 모든 군(郡)을 함락시키고 처음으로 주군(州郡)에서 준수한 자제(子弟)를 선발하여 추천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2년,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득신(馬得臣)이 격구(擊毬)하는 것을 간하자 가상히 여겨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야율휴가(耶律休哥)가 송 나라로 쳐들어 가니 순검사(巡檢使) 윤계륜(尹繼倫)이 그들을 당주(唐州)에서 격퇴시켰는데 휴가가 화살에 맞아 도망하더니, 이때부터 감히 쳐들어가지 못하였다.
순화(淳和 송 태종의 연호) 원년(990, 성종 9), 이계천을 봉하여 하국(夏國) 왕을 삼았다.
2년, 정난군절도사(靖難軍節度使) 이계봉(李繼捧)이 귀순하므로 서평왕(西平王)에 봉하였다. 이계천이 융서를 배반하고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3년, 소덕항(蕭德恒)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4년, 고려왕 왕치(王治)가 표문을 올려 죄를 청하고 여진과 압록강 동쪽의 땅 수백 리를 떼주었다.
5년, 처음으로 대명력(大明曆)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은 가준(賈俊)이 진상한 것이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회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읍(郡邑)에 유시하여 경술(經術)에 밝은 이와 재주가 뛰어난 이, 특이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고 고려에서 여악(女樂)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으며 놀고 먹는 백성이 없게 하였다.
지도(至道 송 태종의 연호) 원년(995, 성종 14), 한덕위(韓德威)가 당항(黨項)ㆍ늑랑(勒浪) 등 부족(部族)을 타일러 진무(振武)로부터 쳐들어가게 하니 영안 절도사(永安節度使) 절 어경(折御卿)이 그들을 자하차(子河汊)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고려에서 동자(童子) 열 사람을 보내와서 거란말을 배우게 하였다.
2년, 고려가 혼인하기를 요청하므로 소덕항(蕭德恒)의 딸을 고려에 시집 보냈다.
3년, 품부(品部)의 부유한 백성들에게 돈을 내게 권유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그리고 평지송림(平地松林)에서 사냥을 하였더니 어머니인 소씨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적 성인(聖人)의 말씀에 욕심을 마음껏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우리 아이가 천하의 임금이 되어 말을 달려 사냥을 하니 만에 한 번이라도 말이 성질을 부려 재갈이 벗겨지고 굴레가 부러져 수레가 뒤엎어지는 변고라도 생긴다면 나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그 사실을 깊이 경계하라.” 하였다.
함평(咸平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2년(999, 고려 목종 2), 융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가서 수성(遂城)을 포위하니, 그곳의 수비대장 양연소(楊延紹)가 굳게 지키므로 마침내 퇴각하면서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자 황제가 친히 그들을 방어하고 전연(澶淵)에 주둔하였다.
3년, 융서가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섰음을 알고 노략질한 것을 놓아 주고 퇴각하니, 범정소(范廷召) 등이 추격하여 막주(莫州)에서 크게 격파시켰다.
4년, 융서가 쳐들어가니 삼로도부서(三路都部署)인 왕현(王顯)이 수성에서 전투하여 2만여 명을 목베었다.
6년, 야율노과(耶律奴瓜) 등이 정주(定州)로 쳐들어가 부도부서(副都部署) 왕계충(王繼忠)을 사로잡아갔다.
경덕(景德 송 진종의 연호) 원년(1004, 목종 7), 융서가 그의 어머니 소씨와 통군(統軍) 소달름(蕭撻凜)과 함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가 전연(澶淵)을 포위하려 하였으나 달름이 쇠뇌에 맞아 죽었다. 황제가 친히 그들을 정벌하려고 전연에 주둔하여 북성문(北城門)으로 행차하였다. 처음에 항복한 장수 왕계충이 융서에게 화친하는 이로움을 말하고 가만히 표문을 올려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조서를 내려 계충을 타이르고 인해서 조이용(曹利用)을 파견하여 융서의 병영에 나아가게 하니. 융서가 한기(韓琦)를 시켜서 이용과 함께 와서 맹약을 요청하라 하였다. 이용이 말하기를 “융서가 남쪽의 땅을 관계하려 합니다.”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땅을 돌려줄 명분이 없다. 만일 꼭 부당하게 요구한다면 나는 마땅히 결전을 할 것이요, 만약 금과 비단을 얻고자 한다면 참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 하고 다시 이용을 보내면서 은(銀) 10만 냥과 명주 20만 필(匠)을 가져가게 하여 맹약을 성취시키고 돌아오니, 융서가 사신을 보내어 맹세하는 편지를 가지고 와서 형으로 섬기려 하였다. 황제가 이로부터 유시를 내려 예물로 해마다 교통하도록 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의 연호) 2년(1009, 목종 12), 융서의 어머니 소씨가 죽었다. 소씨가 임기응변하는 계략이 있어 대신들을 잘 거느렸으며, 다른 나라에 쳐들어갈 때는 갑옷을 입고 싸움을 독려하였고, 화친하는 데 이르러서도 역시 기발한 계략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
3년 고려에서는 강조(康兆)가 그의 임금인 송(誦)을 시해하고 마음대로 송의 형 순(詢)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므로 융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격파하여 강조를 사로잡으니, 동주(銅州)ㆍ곽주(霍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순이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기를 요청하므로 허락하고 정사사인(政事舍人)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으니, 고려의 수장(守將) 탁사정(卓思正)이 사신을 살해하고 한희손(韓喜孫) 등이 보우를 내쫓음으로 융서가 소배압(蕭排押) 등을 보내어 개성(開城)을 공격하니, 순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므로 마침내 개경을 불사르고 군대를 인솔하여 되돌아가더니 항복받은 성을 모두 고려에 되돌려주었다.
5년, 고려에서 채충순(蔡忠順)을 보내어 신하라 일컫기를 요청하므로 융서가 순에게 명하여 직접 조회하게 하였으나 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였다. 이보다 앞서 압록강 북쪽의 땅을 고려에 양도하였더니, 고려에서는 그곳에다 6성(城)을 쌓아 흥주(興州)ㆍ철주(鐵州)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귀주(龜州)ㆍ곽주(郭州)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순이 조회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노엽게 여겨 다시 타일러 6주를 반환하게 하고 귀주(龜州)에다 태학을 설치하고 그곳의 주민에게 교육을 시키니, 본디 신라에서 옮겨온 사람들로서 문자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7년, 해마다 야율자충(耶律資忠)을 사신으로 보내어 6주를 탈취하려 하였으나 고려에서 따르지 않으므로 소적렬(蕭敵烈)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에서는 여진과 함께 그들을 격파하였다.
9년, 야율세랑(耶律世郞) 등이 곽주(郭州)에서 고려와 싸워 크게 격파하고 돌아왔다.
천희(天禧 송 진종의 연호) 원년(1017, 고려 현종 8), 명을 내려 부녀의 재가(再嫁)를 금지시키고 소합탁(蕭合卓)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2년,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3년, 낭군(郎君) 갈불여(曷不呂) 등을 보내어 대군을 거느리게 하여 고려를 침략케 하니 고려왕 순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 바치기를 요청하므로 허락하였다.
4년,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칭하고 억류되어 있던 지랄리(只剌里)를 돌려 보내겠다고 요청하였는데, 지랄리가 6년 동안 고려에 있으면서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특별히 임아(林牙)에 임명하였는데, 임아란 한림(翰林)을 말한다.
건흥(乾興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22, 현종 13), 황제가 세상을 떠나니, 융서가 송 나라 제후국의 대신들을 모아 슬픔을 표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으며, 황제의 어령(御靈)을 안치하여 자복도량(資福道場)을 1백 일 동안 세워두게 하였다. 그리고 국내에 유시하여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고 황제의 휘(諱)함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바로잡도록 하였다.
천성(天聖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5년(1027, 현종 18), 모든 장원(帳院)의 서얼(庶蘖)에게 타일러서 일제히 그 어머니를 따라서 귀천(貴賤)을 따지게 하였다.
6년, 서얼 출신으로 이미 양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세습적으로 선발되는 벼슬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또 유시를 내리기를 ‘양국구(兩國舅)와 남ㆍ북 왕부(王府)는 일국의 귀족이므로 천인과 서얼은 본부관(本部官)에 임명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7년, 상은(詳隱)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효선(蕭孝先)을 가두어 버리고 새 나라를 건립하여 ‘흥요(興遼)’라 하였는데, 융서가 소효목(蕭孝穆)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게 하자 얼마 뒤에 연림이 잡혔다.
9년, 융서가 대복하(大福河)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융서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 슬퍼하여 몸이 야위어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연호 바꾸기를 요청하므로 융서가 말하기를 “연호를 바꾸는 것은 경사스러운 의식인데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길례(吉禮)를 시행하는 것은 불효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날로서 달을 계산하는 법은 옛날의 제도라고 요청하자 융서가 말하기를 “나는 거란의 황제이다. 차라리 옛날 제도를 어기더라도 불효하는 자식이 될 수는 없다.” 하였다. 병이 위독하여지자 아들 종진(宗眞)에게 말하기를 “송 나라와 맺은 맹세는 마땅히 준수하여 과실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하고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이 61세이고 위에 있은 지 49년 만이었다. 연호를 통화(統和)ㆍ개태(開泰)ㆍ태평(太平)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문무대효선황제(文武大孝宣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성종(聖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종진(宗眞)이 위에 오르니 종진의 자(字)는 이불근(夷不菫)이며 어머니는 원비(元妃)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에 봉하여졌는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다. 소씨의 이름은 누근(耨斤)인데 제천황후(齊天皇后) 소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아들 종진을 데려다 기르면서 사랑하기를 자기의 자식과 같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누근이 자기 스스로 황태후(皇太后)가 되어 정사를 청단(聽斷)하였다.
융서가 죽을 무렵에 종진에게 위촉하기를 “황후가 40년 동안 나를 섬겼는데 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너를 명하여 맏아들을 삼았으니, 너의 모자(母子)는 간절히 바라건대 그를 죽이지 말라.” 하였었다. 융서가 세상을 마침에 이르러 좌우들이 누근의 뜻을 받아 제천후의 동생이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누근이 죄인을 신문하여 다스리면서 제천후까지 연좌되게 하니 종진이 말하기를 “나를 어루만져 키워주신 분이 당연히 태후가 되셔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그분을 죄주려 하니 옳은 일입니까?”하였으나 누근이 끝내 그를 상경으로 내쫓았다.
명도(明道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32, 고려 덕종 1), 누근이, 종진이 설림(雪林)에 유람간 틈을 타서 사람을 상경에 보내어 제천후를 시해하게 하였다.
경우(景祐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34, 덕종 3), 누근이 가만히 여러 동생을 불러서 작은 아들 중원(重元)을 왕으로 세우기를 논의하였는데, 중원이 그와 같은 모의를 종진에게 알리자 종진이 마침내 누근으로부터 황제의 인장을 회수하였으며 그를 경주(慶州)에 거처하게 하고, 처음으로 친히 정무를 살피면서 중원을 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4년, 어머니인 누근을 경주에서 맞아들였다.
강정(康定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40, 고려 정종 6), 송 나라를 침략하려 하니, 북원추밀사(北院樞密使) 소효목(蕭孝穆)이 글을 올려 간절히 간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효목은 청렴하고도 근신하며 예의와 법도가 있어 늘 말하기를 “추밀(樞密)은 현명한 이들을 선발하여 놓는 곳인데 무슨 일을 성취시키지 못하겠느냐? 만일 자신이 자질구레한 일을 다 하려 한다면 큰일이 지체되어 나쁜 풍속을 개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요, 벼슬을 하면서 눈앞의 안일만을 탐하는 것은 신하의 본분이 아니다.” 하니 당시에 그를 칭찬하고 소중한 신하로 여겼다.
경력(慶曆 송 인종의 연호) 2년(1042, 정종 8), 소특말(蕭特末) 등을 보내와서 관남(關南)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나라 안이 무사하므로 분을 내어 남쪽으로 침략할 의사를 가지고 송 나라에 대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하(夏) 나라를 정벌한 사실과 병기와 군영(軍營)을 증가시킨 까닭을 문의하였다. 황제가 부필(富弼)을 보내어 땅을 베어달라는 요구에 대하여 물어보자 종진이 말하기를 “송 나라가 약속을 어기어 안문(鴈門)을 막고 민병(民兵)의 명부를 작성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땅을 요구해 보고 주지 않을 때 군대를 동원하여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다.
필이 반복하여 그러한 처사가 옳지 않음을 진술하고 돌아가서 모두 보고하니 다시 필을 사신으로 삼아 화친을 맺는 것과 예물을 증가시키는 것 두 가지 의견을 소지하게 하여 보내니, 종진이 예물을 증가시키겠다는 서약서는 보류하여 두게 하고 야율인선(耶律仁先) 등을 시켜서 필과 함께 와서 해마다 돈 10만 냥과 명주 10만 필을 증가시키도록 의논하게 하였다. 황제가 정조사(正朝使)와 수절사(壽節使)를 보내어 사처에 머무르게 하였더니, 종진이 변장을 하고 가보았다.
4년 초, 국사(國史)를 편수하게 하고 야율곡욕(耶律谷欲)과 야율서성(耶律庶成) 등을 명하여 사관으로 보충시켰다. 처음에 종진이 당항(黨項)을 정벌하니 하주(夏主) 이원호(李元昊)가 그들을 구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곳의 병사와 장수를 징발하여 종진이 직접 원호를 토벌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고하기를 “송 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부디 화친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종원(宗元) 등을 보내어 원호를 토벌하니, 원호가 그들을 맞아 싸워 패배시켰다. 얼마 있다가 포로와 노획한 것을 돌려주었더니, 종진이 드디어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와서 운주(雲州)를 서경으로 삼았다.
6년, 임아(林牙) 소한가노(蕭韓家奴)에게 유시하여 예서(禮書)를 찬술(撰述)하게 하였다.
7년, 공주(公主)가 시부모에게 며느리로서 예절 행하는 법을 정하였다.
황우(皇祐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49, 고려 문종 3), 종진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하(夏) 나라를 토벌하였는데 야율적로고(耶律敵魯古)가 하란산(賀蘭山)에 이르러 원호의 처(妻)를 사로잡아왔다. 그리고 동생이 형을 따라 강도 노릇 하는 자가 있었는데 함께 자식이 없으므로 특별히 그 동생을 용서하여 주었다.
2년, 중 혜감(惠鑑)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해 주었다.
3년, 원호의 처를 소주(蘇州)에 가두어 두었다.
4년, 하 나라와 화친하였다. 종진이 대신에게 유시하여 말하기를 “내가 송 나라의 임금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그의 초상화를 보고 싶으니 타일러 사신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지화(至和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54, 문종 8), 8방(房)의 친족에게 명령하여 두건을 쓰도록 하였다.
2년, 사신을 보내어 건원절(乾元節)을 축하하게 하고, 요 나라 3대 임금의 초상화를 바치고 황제의 초상화를 청구하였다. 그리고 송 나라 사신을 불러 낚시질하며 시를 짓게 하였고, 추산(秋山)에 유람갔다가 몸이 아파서 연조국왕(燕趙國王) 홍기(洪基)를 불러 나라 다스리는 요령들을 타이르고 5방(坊)의 응(鷹)과 골(鶻)을 놓아 주었으며 낚시하는 기구를 태워버리고 세상을 마쳤다.
종진은 성품이 경박하여 늘 밤에 연회를 틈타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대열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변장을 하여 주점과 불사(佛寺)ㆍ도관(道觀)에 드나들었으나 중[浮屠]을 더 중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친히 진사(進士)들에게 과제(課題)를 내주었으며 조례와 제도를 대폭으로 마련케 하여 아래로 모든 선비와 서민들에게까지 편의(便宜)를 진술하게 하였으니 나라가 올바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의지가 절실하였다고 하겠다. 향년이 40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연호를 개원(開元)ㆍ경복(景福)ㆍ중희(重熙)라 고쳤으며 시호를 신성효장황제(神聖孝章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흥종(興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홍기(洪基)가 위에 오르니 홍기의 자는 열린(涅隣)이고 어릴 적 자는 사랄(査剌)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에 봉하여졌다가 진급하여 연조국왕(燕趙國王)으로 책봉되었는데 천성이 침착하고 안정되었으며 엄숙하고 굳세어 매일 조회할 때면 종진이 용모를 단정히 하였으며, 종진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여 정사를 청단(聽斷)하지 않으므로 모든 각료들이 굳게 요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그리고 유시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윗자리에 앉아 지혜와 학식이 따르지 못하며, 여러 아랫사람들을 신임하지 못하며, 세금을 제멋대로 부과하며, 상주고 벌주는 것이 기준에 맞지 않을까 두려우니, 너희 모든 선비와 서민들은 바른말을 거리낌없이 하라.” 하였다.
또 유시를 내려 공훈을 세운 후예자와 이리근(夷离菫)ㆍ부사(副使), 기타 내직의 여러 곳에서 일보는 사람이 아니면 관(冠)과 건(巾)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중원(重元)을 황태숙(皇太叔)으로 삼아 절을 하지 않게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좌이리필(左夷离畢)에게 말하기를 “내가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바른말을 들어서 과실을 바로 잡고자 하였었는데, 벌써 두어 달이 지나도록 가까운 신하들에게 위임한 의사에 부응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실을 내외의 백관들에게 명하여 각자 한 가지씩 말하게 하되 귀천(貴賤)과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모두 바른말을 거리낌없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태학을 설립하여 선비를 길러내게 하고 5경(經)의 전(傳)과 소(疏)를 나누어 주고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배치하였다.
가우(嘉祐 송 인종의 연호) 2년(1057, 고려 문종 11) 초, 종진이 황제의 초상화를 얻으려 하다가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가, 이때에 와서 홍기가 자기의 초상화를 바치고 인하여 황제의 초상화를 요구하였다. 황제가 호숙(胡宿)을 사신으로 자기의 초상화를 받들게 하여 그에게 화답을 하자, 홍의가 의장(儀仗)을 구비하여 맞아보고는 놀라고 숙연해져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말이나 몰고 일산(日傘)이나 가지고 다니는 한 제후국의 산택(山澤) 담당 관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5년, 국사 편찬을 감독하던 야율백(耶律白)이 그들 임금의 시부(詩賦)를 순차에 따라 편찬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그것을 인하여 백에게 서문(序文)을 짓게 하였다.
7년, 동경 유수(東京留守)인 소하랄(蕭河剌)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였으며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자질이 있었는데, 당시 정치의 부합된 점과 모순된 점을 진술하였더니, 홍기가 노엽게 여겨 그를 죽였다.
8년, 황태숙 중원이 북추밀사(北樞密使) 소호도(蕭胡覩) 등과 함께 노수군(拏手軍)을 유인하여 태자(太子) 산행궁(山行宮)을 침범하게 하니, 남원 추밀사 야율인선(耶律人先) 등이 군대를 인솔하여 그들을 방어하였다. 홍기의 어머니 소씨는 궁중을 지키던 군대를 독려하여 중원의 아들 열로고(涅魯古)를 죽이고 반역한 무리들의 가족을 멸족시키니, 중원이 대막(大漠)으로 도망하여 자결하였다.
치평(治平 송 영종(宋英宗)의 연호) 원년(1064, 문종 18), 남경(南京) 백성들에게 물을 터서 벼 심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또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자 간행을 금지시키고, 명을 내려 건문각(乾文閣)에 누락된 경서(經書)를 구하여 유신(儒臣)들에게 교정을 당부하였다.
홍기가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유람을 갔었는데, 어머니 소씨가 활을 쏘아 호랑이를 잡아서 여러 신하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게 하고 명령을 내려 각각 시를 짓게 하였다.
3년, 다시 나라 이름을 요(遼)라 고쳤다.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원년(1068, 문종 22), 영을 내려 남경에 군사도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모두 벼를 심게 하였다.
3년,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영을 내려 이 과에 응시하는 자는 먼저 전공한 부분에 대한 십만 언(十萬言)을 진상하게 하였으며, 마희백(馬希白)이 시 짓는 재능이 민첩하고 정묘하여 열 사람의 관리가 받아써도 못 따른다 하므로 그를 불러서 시험하였다.
4년, 무명 옷감과 명주 옷감의 길이가 짧고 넓이가 좁아 척도(尺度)에 맞지 않게 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부처의 유골(遺骨 사리(舍利)를 말함)을 초선부도(招仙浮圖)에 안치하고 사냥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도살을 금지시켰다.
5년, 경주(慶州)의 근문고(靳文高)가 8세(世)를 함께 살았으므로 벼슬을 내려 주었으며, 눈이 많이 내려 백성들에게 금지 구역에도 들어가 땔나무를 하도록 허락하였다.
8년, 황제가 심괄(沈括)을 보내어 국경을 정하게 하였다. 홍기의 왕후인 소씨(蕭氏)가 자태와 용모가 아름답고 시(詩)도 잘하며 음악도 좋아하더니 태자(太子) 준(濬)을 낳았다. 그 무렵 북원 추밀사 야율을신(耶律乙辛)이 정치를 제멋대로 하면서 왕후의 총명하고 민첩함을 꺼려하여 이에 궁비(宮婢) 단등(單登) 등에게 왕후가 음악 담당관인 조유일(趙惟一)과 사통하였다고 무고하게 하고 을신이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유일을 멸족시키고 왕후에게는 자결하게 하였다.
9년, 홍기가 기거주(起居注)를 보려 하였는데 수주랑(修注郞) 불전(不攧)과 홀돌근(忽突菫) 등이 진상하지 않으므로 각각 곤장을 쳐서 파면시켰다.
10년, 을신이 태자 준을 시해하였다. 준이 학문을 좋아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그 당시 을신이 벌써 준의 어머니에게 해를 입히고는 그들의 무리인 소하말(蕭霞抹)의 누이를 왕후로 삼고 또 준을 해치려 하니, 호위(護衛)인 소홀고(蕭忽古)가 그 상황을 알고 을신을 죽이려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을신이 소화도알(蕭訛都斡) 등에게 명하여 홀고 등이 을신을 죽이고 준을 세워 황제를 삼으려 계략을 꾸몄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준을 폐하여 평민으로 만들어 상경(上京)으로 옮기게 하고, 그 사건에 연루된 신하들을 모두 살해하고, 을신이 사람을 보내어 준을 살해하고는 거짓으로 병사한 것처럼 하고, 다시 준의 비(妃)를 죽였다. 홍기가 뒤늦게 준이 원통하게 죽은 것을 알고 추시(追諡)하여 소회태자(昭懷太子)란 시호를 내렸다.
원풍(元豐 송 신종의 연호) 원년(1078, 문종 32), 제로(諸路)의 반승니(飯僧尼)가 36만 명이 된다고 아뢰었다.
3년, 준의 아들 연희(延禧)가 겨우 여섯 살이 되었는데 을신이 또 그를 해하려고 인하여 말하기를 “송 위왕(宋魏王) 화로알(和魯斡)의 아들 순(淳)을 황태자로 삼을 만합니다.” 하였으니, 화로알은 곧 홍기의 동생이었다.
그러자 북원 선휘사(北院宣徽使) 소올납(蘇兀納) 등이 간하기를 “적통(嫡統)을 버리고 세우지 않음은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하자, 홍기가 미심쩍게 여겨 결정을 못하다가 흑산(黑山)에 사냥하러 가서 왕의 행차를 뒤따르는 관속들이 많이 을신을 수행하는 것을 본 뒤에야, 을신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여 흥중부(興中府)로 내쫓고 그의 무리들을 모두 물리쳐 버렸으며, 그 뒤에 을신을 내주(萊州)에 가두었다. 그리고 연희를 책봉하여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4년, 부마(駙馬) 소수알(蕭酬斡)의 사제(私第)에 행차하여 술을 마셨더니, 재상 양영(梁穎)이 간하기를 “천자는 신하의 집에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곧 대궐로 돌아왔다.
5년, 거서(秬黍)로 정한 되[升]와 말[斗]의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후비(后妃) 소씨(蕭氏)를 강등시켜 혜비(惠妃)라 하였다. 그의 어머니 연국부인(燕國夫人)이 염매(厭魅 주술(呪術)로 남을 저주하는 것)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비(妃)의 직위를 낮추어 서인이 되게 하여 의주(宜州)에 가두었다.
6년, 을신이 송 나라로 도망을 꾀하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중 선지(善知)를 시켜 고려에서 보내온 불경을 교정하도록 하고 널리 펴 시행하게 하였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원년(1086, 고려 선종 3), 임시 한림학사(翰林學士) 조효엄(趙孝嚴)과 지제고(知制誥) 왕사유(王師儒) 등을 불러서 오경(五經)의 대의(大義)를 강의하게 하였다.
4년, 학자들에게 필수로 도(道)를 밝히고 경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7년, 생여진부 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 핵리발(劾里鉢)이, 병이 위독하여 그의 아우인 영가(盈哥)에게 말하기를 “거란에 관한 일들을 잘 분별하여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은 둘째 아들 아골타(阿骨打)뿐이다.” 하고 세상을 마쳤다.
핵리발은 위엄스럽고 신중하며 지혜가 많아, 약한 것을 변경시켜 강하게 만들었으므로 창업 기반이 처음으로 커졌다.
소성(紹聖 송 철종의 연호) 3년(1096, 고려 숙종 1), 세마(洗馬) 유휘(劉煇)가 글을 올리기를 “구양수(歐陽脩)가 《오대사(五代史)》를 편찬하면서 우리 요 나라를 사이(四夷)에 부속시켜 제멋대로 깎아내려서 헐뜯었으며, 또 송 나라는 요 나라를 의뢰하여 외국과 교통하며 화친을 맺어 형제국으로서의 예를 극진하게 하였는데도, 이제 와서 도리어 신하를 시켜 망령스럽게 사서(史書)를 저작하게 하고 관심을 갖지 않으니, 신은 바라옵건대 송 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의 사적을 자세하게 국사에 덧붙이게 하십시오.” 하니,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예부 낭중(禮部郎中)으로 전직시켰다.
4년, 하(夏) 나라 사람이 와서 송 나라가 요새에다 성을 쌓는다고 하자, 흥기가 사신을 보내어 하 나라와 화친하기를 요청하였다.
원부(元符 송 철종의 연호) 3년(1100, 숙종 5), 유사(有司)가 관아의 공문서에 송 나라 황제의 ‘사위(嗣位)’를 ‘등보위(登寶位)’라 썼다 하여 재상 정전(鄭顓) 이하의 관원의 직위를 삭탈하였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송 철종의 연호) 원년(1101, 숙종 6), 홍기가 혼동강(混同江)에서 세상을 마쳤다. 홍기가 처음 즉위하여 바른말을 요구하고 다스리는 도리를 문의하였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정이 다투어 일어나는 데 이르러서는 자기의 동기(同氣)도 보호하지 못하였으며, 여러 부족이 배반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므로 편안한 해가 없었다. 향년이 70세이고 위에 있은 지 47년 만이었다. 연호를 청녕(淸寧)ㆍ함옹(咸雍)ㆍ태강(太康)ㆍ태안(太安)ㆍ수륭(壽隆)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인성대효문황제(仁聖大孝文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도종(道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손자 연희(延禧)가 위에 오르니 연희의 자(字)는 연녕(延寧)인데 어릴 적 자는 아과(阿果)이다. 준(濬)의 아들로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다가 진급하여 연국왕(燕國王)에 책봉되었고 즉위하여 처음으로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
그리고 명을 내려 을신에게 죄없이 모함된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벼슬을 복직시켜 주게 하였으며, 관에서 몰수한 재산을 되돌려 주게 하고 귀양간 사람들을 되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황제ㆍ황후라 하였다. 생여진부 절도사 영가가 죽고 위를 형의 아들인 오아속(烏雅束)에게 전하였는데, 오아속이 죽자 그 아우 아골타가 위를 이어받았다.
숭녕(崇寧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원년(1102, 숙종 7), 을신의 도당을 죽이고 그들의 자손들을 변방으로 옮기게 하고 을신의 관(棺)을 쪼개었으며, 그들의 가속(家屬)들을 을신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년, 연희가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시찰하였다. 그리고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하 나라를 정벌하지 말도록 요청하니, 황제가 한림학사 임여(林攄)를 보내어 회답하게 하였다.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1, 고려 예종 6), 황제가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 정윤중(鄭允中)과 환관 동관(童貫)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처음에 임여가 귀국하여 요 나라의 내부가 단결되지 않고 있으니 정벌할 만하다고 말하므로 황제가 처음으로 북벌할 뜻을 두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관 등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마식(馬植)이 연희에게 벼슬하여 광록경(光祿卿)이 되었는데 몰래 동관을 찾아보고 요 나라를 멸망시키는 계책을 진언하므로, 관이 그를 데리고 귀국하여 성명을 이양사(李良嗣)라 고쳤더니, 황제가 조씨(趙氏) 성(姓)을 하사하였다.
2년, 연희가 혼동강에 갔었는데 생여진의 추장(酋長)들이 모두 와서 조회하고 두어연(頭魚宴)에 참여하면서 주흥이 한창일 때 연희가 추장들에게 명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라고 하였더니, 아골타만이 춤을 못 춘다고 사양하므로 두세 번 타일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연희가 비밀로 북원 추밀사 소봉선(蕭奉先)에게 유시하여 “국경의 일을 청탁하고 그를 죽여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뒷날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봉선은 생각하기를 “그는 예의를 모르고 또 큰 잘못이 없는데 죽인다면 덕화를 사모하는 마음을 다치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자 연희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자 아골타는 언희가 다른 뜻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의심하였고, 또 연희가 심한 주정 때문에 나라 정치를 구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병을 핑계로 다시 오지 않았다.
4년, 초에 여진이 군대를 일으켜 흘석열부(紇石烈部)의 사람 아소(阿疎)가 복종하지 않는다고 성토하니, 아소가 도망을 왔었는데 이때에 와서 아골타가 사람을 보내어 아소를 찾아내려 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으므로 아골타가 마침내 여러 부족의 군대를 모집하여 은출할(銀朮割) 등을 장수로 삼아 요 나라의 잘못을 하나하나 책망하여 하늘과 땅에 고한다 하고 영강주(寧江州)를 진격하니, 연희가 사공(司空) 소사선(蕭嗣先) 등을 보내어 그들을 막게 하였으나 아골타가 연달아 싸워 크게 격파시켰다.
요 나라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여진의 군대가 1만 명만 되면 겨루지 못한다.” 하더니,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1만 명이 되었다고 하였다.
5년, 아골타가 황제라 자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연희가 사신을 금에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아골타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여 와서 야율알리타(耶律斡里朶) 등과 싸웠는데 달로고성(達魯古城)에서 패배시켰다. 연희가 또 사신을 보내 빨리 항복하라고 타이르자 아골타도 항복하기를 타이르는 회답을 보내오므로, 연희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려고 어영도통(御營都統) 소봉선(蕭奉先) 등을 선봉으로 야율장노(耶律章奴)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는데, 장노가 배반하여 상경(上京)으로 도망하여 종실(宗室) 위국왕(魏國王) 순(淳)을 맞아 왕으로 세우기를 계획하고 왕비의 친동생인 소체리(蕭諦里)를 보내어 순을 설득시켰으나, 순이 소체리의 목을 베어 바쳤다.
이에 장노가 광평정(廣平淀)에 나아가 행궁(行宮)을 침범하고, 인하여 여진으로 도망하였으나 순라군에게 잡혀서 왕이 머무는 곳으로 압송되었다가 허리를 잘려 죽었다. 연희가 타문(駝門)에 이르니, 소특말(蕭特末) 등이 기마병(騎馬兵)과 보병(步兵) 45만을 거느리고 알인락(斡隣濼)에 도착하여 있었다. 그 즈음 연희가 장노의 배반 때문에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였더니, 아골타가 추격하여 크게 격파시키자 도감(都監) 야율장가노(耶律張家奴)가 배반하였다.
6년, 동경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유수(留守) 소보선(蕭保先)을 살해하자, 보선의 비장(裨將) 고영창(高永昌)이 요양(療陽)을 근거지로 국호(國號)를 참칭하고 연호를 세우므로 연희가 소한가노(蕭韓家奴)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니, 장가노가 고주(高州)를 함락시키므로 연희가 직접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아골타가 고영창을 공격하여 죽이고 동경(東京)의 주현(州縣)을 모두 탈취하였다.
7년, 연희가 음량하(陰凉河)에 가서 요동(遼東) 사람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어 여진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고 이름을 원군(怨軍)이라 하였는데, 8영(營)이나 되었다. 위주(衛州) 질려산(蒺藜山)에 주둔하였더니 금 나라 사람들이 질려산을 공격하여 깨뜨리고는, 끝내 현주(顯州)ㆍ건주(乾州)ㆍ의주(懿州) 등 7주(州)를 모두 빼앗았다.
철주(鐵州) 사람 양박(楊朴)이 아골타에게 예부터 영웅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 꼭 먼저 대국에 봉책을 요구하여야 한다고 설득시켰더니,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논의하고 봉책하여 주기를 요구하였다.
중화(重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8, 예종 13), 황제가 무의대부(武義大夫) 마정(馬政)을 금 나라에 보내어 친선을 도모하게 하고 함께 요 나라를 정벌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런데 연희가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더니, 아골타의 답서에 금 나라를 형으로 섬기고 해마다 방물바칠 것을 요청하였다.
선화(宣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9, 예종 14), 아골타가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요 나라를 협공할 것을 타일렀다. 그리고 소재(少宰) 왕보(王黼)가 화학정(畫學正) 진요신(陳堯臣)을 추천하여 요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더니, 요신이 연희의 초상화를 그려서 귀국하여, 황제께 말하기를 “관상보는 법으로 논한다면 그의 멸망이 조석(朝夕)에 달렸습니다.” 하면서 그 나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그려서 함께 올렸다.
연희가 사신을 보내어 아골타를 책봉하여 동회국(東懷國) 황제로 삼았다. 이에 앞서 일곱 차례나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책봉하는 예를 의논하였고 금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환영하였으나, 도착한 책봉서에 형으로 섬긴다는 내용은 없고 또 대금(大金)이라는 호칭도 않고 동회라 하였으니, 이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덕화를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하여, 그들의 어긋난 예의를 책망하면서 받지 않았다.
2년, 이보다 앞서 연희가 사신에게 책봉한 초고(初藁)를 소지케 하여 금 나라에 보내니, 금 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낼 때 책봉한 부본을 가져가게 하여 회답을 하였는데, 연희가 금 나라에서 정한 대성(大聖) 두 글자는 자기 선대의 칭호를 범하였다 하여 사신을 보내어 가서 의논하게 하자, 아골타가 노하여 외교관계를 끊고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상경(上京)을 공격하였더니, 유수 소달불야(蕭撻不也)가 나와 항복하였다. 제가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함께 요 나라 공격하기를 약속하였다.
3년, 연희의 아들이 넷이었는데 장남은 조왕(趙王) 습니열(習泥烈), 차남은 진왕(晉王) 오로알(敖盧斡), 다음은 진왕(秦王) 정(定), 다음은 허왕(許王) 영(寧)이었다. 당시 여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연희가 사냥놀이를 하므로 진왕(晉王)의 어머니인 문비(文妃) 소씨가 노래를 지어 풍자하여 간(諫)하였다.
추밀사 소봉선(蕭奉先)은 원비(元妃)의 오라버니로 진(秦)ㆍ허(許) 두 왕의 외삼촌이었는데, 진왕(晉王)이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으므로 진왕(秦王)이 위에 오르지 못할까 하여 가만히 계책을 꾸몄다. 문비의 언니가 야율달갈리(耶律撻曷里)에게 시집갔으며 동생은 야율여도(耶律余覩)에게 시집을 갔었다. 봉선 등이 문비와 부마(駙馬) 소욱(蕭昱)과 여도ㆍ달갈리 등이 진왕(晉王)을 세우려고 계책을 꾸민다고 무고하자 연희가 욱과 달갈리 그리고 문비를 죽였는데, 마침 여도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겁을 먹고 금 나라에 항복하였다. 아골타가 여도를 길잡이로 삼아 중경(中京)으로 향했다.
4년 여도가 누실(婁室)을 인도하여 갑자기 이르니 연희가 매우 걱정을 하므로 봉선이 말하기를 “여도가 이번에 온 것은 자기의 생질인 진왕(晉王) 때문이니 그를 죽여 버리면 여도가 저절로 돌아갈 것입니다.”하였다. 때마침 야율살팔(耶律撒八) 등이 진왕을 세우려고 계략을 꾸몄다가 사실이 발각되었으므로 연희가 드디어 진왕을 죽였는데, 이 때문에 인심이 흩어졌다.
금 나라 군대가 원앙락(鴛鴦濼)에 있는 행궁(行宮)을 핍박하자 연희가 운중(雲中)으로 도망하였는데 점몰갈(粘沒喝)이 추격해오므로 연희가 협산(夾山)으로 들어갔다. 연희는 그제야 봉선의 충성스럽지 못함을 깨닫고 노여워서 말하기를 “나를 따르지 말라.” 하자 봉선이 절하고 떠나가더니, 그 부하에게 잡혀서 묶이어 금 나라 군대에 압송되었는데 연희가 다시 잡아서 죽였다. 처음에 연희가 운중으로 도망갈 때 유임된 남부재상(南部宰相) 장임(張琳)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처온(李處溫)이 진진국왕(秦晉國王) 순(淳)과 함께 연경을 지켰었는데, 이때 이르러 처온이 대신(大臣)인 야율대석(耶律大石) 등과 함께 순을 옹립하고 연호를 건복(建福)이라 하니, 이것이 세상에서 일컫는 북요(北遼)이다. 얼마 지나 연희를 강등시켜 상음왕(湘陰王)으로 삼았다. 금 나라 사람이 와서 요 나라를 협공하자고 약속하므로 황제가 동관을 명하여 하북하동로 선무사(河北河東路宣撫使)로 삼아서 대응하게 하였는데, 금 나라 사람들이 서경을 탈취하자 사막(沙漠) 이남의 부족(部族)들이 모두 항복하니, 연희가 와사열(訛莎烈)로 도망하였다.
사신을 보내와서 동관에게 말하기를, “여진이 배반하는 것은 남조(南朝 송을 말함)도 미워할 것인데 백 년간의 화친을 포기하고 뒷날의 재화(災禍)를 장만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느냐? 재난에서 건져내며 이웃을 구휼하여 주는 것이 고금을 통한 도의이니 대국(大國)은 생각하여 보라.” 하니, 동관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순(淳)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는데 연희가 격문을 천덕(天德) 등의 주(州)에 전하였음을 듣고 매우 걱정스럽게 여겨 대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처온(處溫) 등이 진왕(秦王 연희의 아들 정(定)을 말함)을 맞아들이고 상음(湘陰 상음왕 연희를 말함)은 거절하자는 의견을 말하니, 야율영(耶律寧)이 말하기를 “진왕과 상음왕은 부자간이다. 어찌 아들을 맞아들이고 아버지는 거절한단 말인가?” 하자, 처온이 영을 죽이려 하매, 순이 말하기를 “충신은 죽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윽고 순이 죽자 군중들이 순의 처 소씨를 세워서 황태후로 삼았다. 얼마 지나 연희의 셋째 아들인 진왕 정(定)을 세워 황제를 삼고 연호를 덕흥(德興)이라 하였으며, 순에게 시호를 내려 효장황제(孝章皇帝)라 하였다. 처온이 화를 입을까 겁을 내어 남으로는 송 나라와 통모하고 북으로는 금 나라와 통모하여 내응하려고 하였으므로 황후가 그를 잡아서 죽였다. 아골타가 연희를 석련역(石輦驛)까지 뒤쫓아가자 연희가 낙곤수(落昆髓)로 도망하였다.
곽약사(郭藥師)가 탁(𣵠)ㆍ이(易) 두 고을을 거느리고 투항하자 동관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아골타가 연경(燕京)을 침입하자 소후(蕭后)가 천덕군(天德軍)으로 도망하였다.
5년, 북원추밀사 해왕(奚王) 회리보(回离保)가 스스로 위에 올라 해국황제(奚國皇帝)라 하더니 뒤에 자기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연희가 남경(南京)이 격파되었음을 듣고 사부족(四部族)으로 도망하였는데, 소후가 와서 뵈었더니 연희가 노하여 그를 죽이고 추존하였던 순(淳)을 강등시켜 서인이 되게 하였다.
금(金)의 알리불(斡离不) 등이 거용관(居庸關)에 이르러 야율대석(耶律大石)을 사로잡아 그를 길잡이로 응주(應州)에 있었던 연희를 습격하니, 진(秦)ㆍ허(許)의 두 왕과 여러 왕비 그리고 공주와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잡혔는데, 특모가(特母哥)가 연희의 둘째 아들 아리(雅里)와 몰래 연희의 진영으로 갔었다. 연희가 운내(雲內)로 도망하였더니 하왕(夏王) 이건순(李乾順)이 사신을 보내어 연희에게 자기 나라로 오기를 청하였다. 소특렬(蕭特烈)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금숙군(金肅軍)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특렬 등이 아리를 겁박하여 서북부(西北部)로 도망하게 하여, 그를 세워 황제로 삼고 연호를 신력(神曆)이라 하였다.
처음에 장각(張殼)이 평주사(平州事)를 맡아 군대를 훈련시켜 대비하였는데 금 나라 사람들이 평주를 승격시켜 남경을 삼고, 각에게 평장판유수사(平章判留守事)를 더하여 주었다. 이때에 와서 금 나라 사람들이 포로로 잡은 재상 좌기궁(左企弓) 등을 데리고 연경의 부호들과 함께 동으로 이사하게 하였는데, 그 길이 평주를 지나가게 되자 각의 휘하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이 만약 의(義)를 가지고 왕을 보좌하여 요(遼)를 다시 일으킬 것을 계획한다면, 먼저 기궁 등을 죽이고 연(燕) 나라 백성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평주(平州)를 송 나라에 돌려준다면 끝내는 울타리가 될 것이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니, 각이 마침내 기궁 등을 죽이고 연희의 초상을 그려 조석으로 배알하고 모든 일은 알린 뒤에 시행하였다. 이윽고 송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황제가 명을 내려 벼슬을 후하게 더하여 주고 위로하였다. 뒤에 알리불(斡离不)에게 패배하자 황제가 죽이도록 명하고 그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금 나라에 주었다.
처음에 금 나라 사람이 연경을 함락시키자 소알(蕭斡)이 해왕부(奚王府)에 나아가 스스로 위에 올라 신성황제(神聖皇帝)라 하면서 연달아 경주(景州)ㆍ계주(薊州)를 함락시키더니, 얼마 지나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금주(金主) 아골타가 세상을 마치고 아우 오걸매(吳乞買)가 위를 이었으며, 야율대석이 금에서 돌아오자 연희가 그를 석방시켜 주고 연희도 돌아와 돌여불부(突呂不部)에서 기거하였다. 아리(雅里)가 죽자 소특열 등이 다시 종진(宗眞)의 손자 구열(求烈)을 왕으로 세웠더니, 뒤에 반란병에게 살해당하였다.
6년, 연희가 마가군(馬哥軍)에 이르렀다가 금인(金人)의 습격으로 오적렬부(烏敵烈部)로 도망하여 재차 군사를 동원하려 하므로, 대석이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대석이 끝내 자기가 왕이 되었다. 연희가 금 나라와 싸우다가 패배하여 산음(山陰)으로 도망하였다.
7년, 당항(黨項)의 소곡록(小斛祿)이 연희에게 자기 땅으로 오라고 요청하였다. 천덕(天德)에 이르러 눈을 만나 식량이 떨어졌는데 야율출자(耶律朮者)가 보리가루와 대추를 진상하였으며, 연희가 휴식하려 하면 출자가 꿇어앉아 자기에게 기대게 하였다. 밤이 되어 민가에 유숙하려고 정탐하러 온 기병이라고 속여 말했으나 그집에서 알아차리고 말머리를 어루만지며 꿇어앉아 크게 슬퍼하였는데, 연희가 며칠 동안 기거하면서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절도사를 제수하였다.
그 뒤 응주에 이르러 금 나라 장수 누실(婁室)에게 잡혔는데, 뒤에 강등되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하여졌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연호를 건통(乾統)ㆍ천경(天慶)ㆍ보대(保大)라 고쳤으며 스스로 천조황7제(天祚皇帝)라 하였는데, 금에서 예왕(豫王)으로 고쳐 봉하고 여양(閭陽) 건릉(乾陵) 곁에 장사지냈다.
야율대석의 자는 중덕(重德)이니 아보기의 8세 손으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림응봉(翰林應奉)으로 뽑혔다가 요흥군절도사(遼興軍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연희가 쫒겨다닐 때 대석이 진진왕(秦晉王) 순을 옹립하였으며 순이 죽자 연희가 대석을 책망하였으나 석방하여 주었고, 대석이 연희에게 금 나라와 싸우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추밀 소을설(蕭乙薛)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어 서쪽으로 도망하여 가돈성(可敦城)에 이르렀다.
정강(靖康 송 흠종(欽宗)의 연호) 원년(1126, 고려 인종 4), 회골왕(回鶻王) 필륵가(畢勒哥)가 그를 맞아주었고, 국경 밖까지 전송하여 주었으며 군대가 만리를 행진하였다. 기아만(起兒漫)에 도착하여 황제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서요(西遼)이다.
2년, 동으로 돌아가 호사알이타(虎思斡耳朶)에 도성(都城)을 쌓았다.
소흥(紹興 송 고종(高宗)의 연호) 6년(1136, 인종 14),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0세이고 위에 있은 지 12년 만이었다. 연호를 연경(延慶)ㆍ강국(康國)이라 고쳤으며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하였다. 아들 이열(耳列)이 어리므로 처 소씨(蕭氏)가 대신 정사를 보았는데, 이름은 탑불연(塔不煙)이고 호(號)를 감천황후(感天皇后)라 하였다.
12년, 세상을 떠나니 섭정한 지 7년 만이었다. 연호를 함청(咸淸)이라 하였다. 이열(夷列)이 위에 올랐다.
22년, 세상을 마치니 위를 참칭한 지 13년 만이었다. 연호를 소흥(紹興)이라 고치고 묘호를 인종(仁宗)이라 하였다. 아들이 어리므로 누이 보속완(普速完)에게 유언으로 명하여 섭정하게 하였는데, 호를 승천태후(承天太后)라 하였다.
뒤에 부마 소타노불(蕭朶魯不)의 아우 박고지사리(朴古只沙里)와 통간하고 인하여 부마를 살해하였다.
건도(乾道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4년(1168, 고려 의종 22), 부마의 아버지 소알리랄(蕭斡里剌)이 보속완을 쏴 죽였는데 섭정한 지 15년 만이었다. 연호를 숭복(崇福)이라 고쳤다. 이열의 둘째 아들 직노고(直魯古)가 위에 올랐다.
가태(嘉泰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원년(1201, 고려 신종 4), 사냥을 갔었는데 내만왕(乃蠻王) 굴출률(屈出律)이 군사를 잠복시켜 사로잡게 하여 그의 왕위를 차지하고는 직노고를 추존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았다. 얼마 후 세상을 마치니 위에 있은 지 34년 만이었다. 연호를 천희(天禧)라 고쳤으며 요 나라가 망하였다.
요(遼) 나라는 본디 선비(鮮卑)의 땅으로 요(遼) 일대의 늪지대에서 살았는데 유관(楡關 산해관(山海關))까지 1천 1백 30리였다. 개척한 땅이 점점 넓어져 5경(京) 6부(府)에 1백 56개의 주(州)ㆍ군(軍)ㆍ성(城)과 2백 9현(縣), 그리고 52부족(部族)과 60속국(屬國)을 두었으며, 옛 유주(幽州)ㆍ병주(幷州)의 땅을 포괄하여 동으로는 바다에 서로는 유사(流沙)에 북으로는 여구하(臚朐河)에 남으로는 백구(白溝)에 닿아 폭과 둘레가 만 리나 되었다.
상경(上京)은 임황부(臨潢府)로 본래 한(漢)의 요동군 서안평(遼東郡西安平)인데, 요의 큰 도읍지로 뒤는 산, 앞은 바다로 농사짓고 목축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동경은 요양부(遼陽府), 중경은 대정부(大定府), 남경은 석진부(析津府), 서경은 대동부(大同府)이며 모든 주현(州縣)은 5경(京)에 분할하여 예속되게 하였다. 왕의 평상 거처에 궁위(宮衛)를 두는 것을 알노타(斡魯朶)라 하고, 행차 때 행궁(行宮)을 두는 것을 날발(捺鉢)이라 하며, 국경지대의 진지를 분할한 것을 부족(部族)이라 하였다.
일이 생기면 침공하고 싸우고 한가하면 사냥하고 고기를 잡았는데, 그들의 왕이 가끔 춘수(春水)와 추산(秋山) 그리고 대막(大漠) 사이에 행차하여 유람하였다. 그 지방은 심한 추위와 바람 때문에 수시로 옮겨다니면서 수레와 말을 집으로 삼아 가을과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고 봄과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였다. 주민들의 나이 15세 이상 50세 이하를 군대에 예속되게 하였는데 늘 정규군 1명에 말 3필과 타초곡(打草穀)이 따랐으며, 군영을 지킬 적에는 집에서 부리는 장정을 각각 한 사람씩 배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마다 쇠갑옷, 말등에 덮는 방석ㆍ고삐, 말의 갑옷, 활 4개ㆍ화살 4백 개ㆍ길고 짧은 창ㆍ홀타(𨪷𨦃)ㆍ작은 도끼ㆍ큰 도끼ㆍ작은 기(旗)ㆍ쇠몽둥이ㆍ송곳ㆍ화도석(火刀石)ㆍ말구유ㆍ사탕 1말ㆍ사탕자루ㆍ탑모산(搭傘) 각 1개, 말을 매는 끈 2백 척(尺)을 모두 각자 구비토록 하였다. 사람과 말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지 않고 날마다 타초곡을 사방에 내보내어 노략질하여 제공토록 하였다. 그리고 사납고 모진 사람 1백 명 이상을 선발하여 멀리 정탐군으로 삼아 선봉의 앞 뒤 20여 리의 간격으로 배치하여, 밤중에 10리나 5리쯤 행군하다가 조금씩 머물면서 말에서 내려 귀를 기울여 사람과 말의 소리를 들어보고 들리면 그들을 사로잡고, 힘으로 상대하지 못할 적에는 선봉에서 급히 연락하였다. 군대 병력은 1백 6십 4만 2천 8백 명으로 궁궐 호위병과 부족 등의 군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관리는 남북으로 나누었는데 본국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漢)의 제도로는 한 나라 사람들을 대우하게 하였다. 아보기가 질랄(迭剌)과 이리근(夷離菫)을 분할시켜 남북 두 대왕(大王)을 삼았는데 그것을 북남원(北南院)이라 하였다.
북추밀은 병부(兵部)를, 남추밀은 이부(夷部)를, 북남 두 왕은 호부(戶部)를, 이리필(夷離畢)은 형부(刑部)를, 선휘(宣徽)는 공부(工部)를, 적렬마도(敵烈麻都)는 예부(禮部)를 관장하였으며, 북남부(北南府)의 재상이 통솔했는데, 북쪽은 황족(皇族) 4장(帳)이며 남쪽은 국구(國舅) 5장(帳)인데 대대로 그들을 선발하는 데 참여하게 하였다.
척은(惕隱)은 종족(宗族)을 통치하고 임아(林牙)는 외교문서와 보고문서를 편수하였으며, 우월(于越)은 가만히 앉아 공사(公師 삼공)의 상징으로 논의하였다. 태자(太子)ㆍ친왕(親王)이 군사상의 정무를 총괄하게 되면 그것을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라 하였으며, 대원수(大元帥)ㆍ도원수(都元帥)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남북에 좌우피실군(左右皮室軍)과 황피실군(黃皮室軍)이 있었는데 모두 정예의 군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천지(天地) 신(神)을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제산의(祭山儀)라 하며, 가물 때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는 것을 슬슬의(瑟瑟儀)라 하며, 또 사유의(射柳儀)와 시책의(柴冊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풍속에 12세만 되면 꼭 한 차례 재생의(再生儀)를 시행하였는데 그것을 부탄(覆誕)이라고도 하였으며, 어머니의 산실(産室)을 마치 처음 태어날 때처럼 설치하여 어머니의 수고롭고 애쓴 은혜를 간직하게 하였으며, 이 의식은 왕과 왕후ㆍ태자 그리고 이리근(夷離菫)만이 행사하게 하였다.
그들의 음악을 아악(雅樂)과 이적(夷狄)의 악(樂)을 섰었으며 그들의 왕과 남반(南班)의 한관(漢官)들은 한(漢) 나라의 복장을 사용하였었고, 왕후와 북반(北班)의 요(遼) 나라 사람들은 본국의 복제를 사용하였는데 본국의 복장 제도로는 관료들은 관복에다 모전(毛氈)으로 만든 관(冠)을 쓰고 금으로 만든 꽃을 꽂았으며, 혹 주옥(珠玉)과 물총새의 깃을 꽂기도 하였다. 이마 옆에 금으로 만든 꽃을 드리우고 배를 짜서 좁은 띠를 만들었으며 머리는 가운데로 모아 한 타래로 만들었다. 그리고 혹 깁으로 관(冠)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는데 그 모양은 오사모(烏紗帽)와 같았으나 차양(遮陽)은 없고 양쪽 귀를 누르지 않게 하였으며, 이마 위에는 금으로 만든 꽃을 꽂아 위에 있는 붉은 댕기에 묶어 그 끝에는 구슬을 달았다.
그리고 붉고 소매가 좁은 도포를 입고 점첩대(䩞鞢帶)를 매었는데 황록색이고, 금옥(金玉)ㆍ수정(水晶)ㆍ정석(靛石)으로 장식하였다. 그들 왕의 공복(公服)은 붉고 검은 두건과 붉고 소매가 좁은 도포를 입고 띠를 둘렀으며, 관료들도 두건에다 붉은 옷을 입었는데 그들의 평상시 복장은 주로 붉고 파란 색깔이며, 군복은 모두 옷깃이 왼편으로 되었는데 검고 푸른 색깔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형벌은 4가지가 있었는데 사형ㆍ귀양ㆍ징역ㆍ곤장이며, 또 경자(黥刺 얼굴에 먹물을 넣는 형벌)ㆍ목검(木劒)ㆍ대봉(大棒)ㆍ철골타(鐵骨朶)ㆍ채찍ㆍ지지는 형법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아보기(阿保機) 부자(父子)가 백 번 싸워 이기는 형세를 틈타 새로운 나라를 일으켰으니 그 웅장한 지모(智謀)와 큰 계략(計略)은 원대하다 하겠다.
올욕(兀欲)의 중인(中人) 자질과 술률(述律)의 잔인하고 포악함 때문에 연거푸 시해와 반역을 당하였으나 그들의 창업 기반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역대의 권위와 명령이 오히려 흡족하게 그 나라 사람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융서(隆緖) 때부터 거듭 이웃 나라와 화친을 굳게 하여 나라 안팎이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였으니 어찌 그렇게 성대하였는가?
연희 때 와서 간사한 무리들의 말을 높이 신용해서 자신이 국가의 기틀을 망쳤다. 금 나라 군대가 한 번 쳐들어 오려 하자 나라 안에서 반란이 먼저 일어나 왕을 폐하고 세우는 모략과 배반하고 도망하는 자취가 끊이지 않고 벌떼같이 일어나서 끝내 회복시켜 부지하지를 못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순(淳)과 아리(雅里)가 말한 ‘명분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을 완성시키지 못한다.’고 한 것과 대석(大石)이 억지로 연장시켜 보려고 한 것이 그중 나은 것이지만 얼마나 더 낫겠는가?
[주-D001] 5방(坊) :
한구사(閑廐使)의 관장하에 있으면서 천자의 사냥에 수시로 제공되는 다섯 구획으로 첫째를 조방(雕坊), 둘째를 골방(鶻坊), 셋째를 요방(鷂坊), 넷째를 응방(鷹坊), 다섯째를 구방(狗坊)이라 한다.
[주-D002] 두어연(頭魚宴) :
요(遼) 나라 때 천자가 낚시질하여 제일 큰 고기를 낚았을 적에 베푸는 주연(酒宴)을 말한다.
[주-D003] 타초곡(打草穀) :
요 나라 때 벌목(伐木)과 목재 운반을 전담하던 군사를 말하는데, 야율 덕광(耶律德光 : 요 태종)이 진(晉) 나라를 멸망시킨 뒤로는 매일 수천 기(騎)를 사방으로 나누어 내보내어 인민(人民)들을 노략질하게 한 무리들을 말한다.
[주-D004] 황족(皇族) 4장(帳) :
황족 4장은 요 태조(遼太祖)의 아버지인 덕조(德祖)의 3방(房) 후예와 횡장(橫帳)인 태조천황제(太祖天皇帝)의 후예를 말하는 것인데, 삼방은 맹부방(孟父房) 암목(巖木), 중부방(仲父房) 석노(釋魯), 계부방(季父房) 날갈(剌葛)ㆍ질랄(迭剌)ㆍ인저석(寅底石)ㆍ안단(安端)ㆍ소(蘇)를 말한다.《遼史 百官志》
[주-D005] 국구(國舅) 5장(帳) :
국구인 대ㆍ소옹장(大小翁帳)과 대ㆍ소부장(大小父帳)과 국구별부(國舅別部)를 말하는 것으로, 국구대소옹장은 을실사(乙室巳) 대옹ㆍ소옹장과 발리(拔里) 대부ㆍ소부장과 소탑갈(蕭塔葛) 국구별부를 말한다.《遼史 百官志, 遼史 表第五》
청장관전서 제22권 / 편서잡고 2(編書雜稿二)동시 스크롤
송사전(宋史筌) 요열전(遼列傳)
[DCI]ITKC_BT_0577A_0250_010_0020_2000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야율경(耶律璟)의 어렸을 적 이름은 술률(述律)이니 덕광(德光)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그의 선조는 선비족(鮮卑族)으로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퇴되어 세 부족으로 나누어졌는데 거란(契丹)은 그 중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 이후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대하씨(大賀氏)라 불렀고 그 후에 다시 요연씨(遙輦氏)로 변경하였는데, 해락(楷落)이라는 이가 처음으로 왕이라 일컬었으며 흠덕(欽德)에 이르러서는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이 되었다. 광계(光啓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 중엽에 유인공(劉仁恭)이 자주 전쟁을 하여 그 뒤로 점점 쇠약하여졌는데, 질랄부(迭剌部)의 우두머리였던 열리(涅里)의 후예인 이리근(夷离菫) 아보기(阿保機)가 거란의 모든 부락을 다 차지하였는데 이리근이란 군마(軍馬)를 통솔하는 큰 벼슬 이름이다. 요연씨가 끝내 멸망하니 아보기가 이름을 고쳐 억(億)이라 하였다. 어릴 적 이름은 철리지(啜里只)이고 호는 세리씨(世里氏)라 하였으니, 세리가 곧 야율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천우(天祐 후당(後唐) 애제(哀帝)의 연호) 정묘년(907, 요 태조(遼太祖) 1), 황제라 자칭하였고 그 뒤 천성(天成 후당 명종(明宗)의 연호) 병술년(926, 요 태종 1)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5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20년 만이었다. 연호를 신책(神冊)ㆍ천찬(天贊)ㆍ천현(天顯)이라 고쳤으며 시호(詩號)를 신열천황제(神烈天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 묘호(墓號)를 조릉(祖陵)이라 하였다.
둘째 아들 덕광(德光)이 위에 오르니, 덕광의 어렸을 적 이름은 요골(堯骨)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청태(淸泰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 병신년(936, 요 태종 11), 석경당(石敬瑭)을 책립(冊立)하여 진제(晉帝)로 삼았다.
천복(天福 후당 명종의 연호) 무술년(938, 요 태종 1), 진 나라가 유주(幽州)ㆍ계주(薊州) 등 16주를 떼어주었다.
개운(開運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연호) 병오년(946, 고려 정종 1), 진(晉)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 이름을 대요(大遼)라 하였으며, 얼마 후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46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21년 만이었다. 연호를 회동(會同)ㆍ대동(大同)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혜문황제(惠文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 묘호(墓號)를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형(兄)의 아들 완(阮)이 위에 오르니, 완의 어릴 적 이름은 올욕(兀欲)이며 인황왕(人皇王)인 배(倍)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후주(後周) 광순(廣順 후주(後周) 태조(太祖)의 연호) 신해년(951, 고려 광종 2), 찰할(察割)이 완을 시해(弑害)하니 향년이 34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5년 만이었다. 연호를 천록(天祿)이라 고치고 시호를 장헌황제(莊憲皇帝)라 하고 묘호를 세종(世宗), 묘호를 현릉(顯陵)이라 하였는데, 사실이 《당서(唐書)》ㆍ《오대사(五代史)》에 적혀 있다. 완이 시해를 당하였으므로 경(璟)이 수안왕(壽安王)으로 위에 올라 조회할 적에 한(漢)의 예(禮)를 사용하였다.
건륭(建隆 송 태조(宋太祖)의 연호) 원년(960, 광종 11), 송 나라 군대가 북한(北漢)의 석주(石州)를 포위하므로 경이 아랄(阿剌)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건덕(乾德 송 태조의 연호) 2년(969, 광종 15), 조빈(曹彬)이 석주를 포위하므로 경이 달열(撻烈)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으나, 빈이 격퇴시켜 도망가게 하였다.
개보(開寶 송 태조의 연호) 2년(969, 광종 20), 측근의 신하인 소가(小哥) 등이 경이 몹시 취한 틈을 타서 회주(懷州)에서 시해하였다. 경이 술을 즐기고 사냥을 좋아하였으며 살생(殺生)을 즐겨 살을 잘게 썰며 시체를 잘게 써는 등 형벌이 문란하여 국인(國人)들이 원망하고 따르지 않았다. 향년이 39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19년 만이었다. 연호를 응력(應曆)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경정황제(敬正皇帝)라 하고 묘호를 목종(穆宗)이라 하였으며 회릉(懷陵)에 부장(附葬)하였다.
둘째 아들 현(賢)이 위에 오르니 현의 자는 현녕(賢寧)이요 어렸을 적 자는 명의(明扆)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겨우 네 살 되던 해 찰할의 난을 만났는데 경이 그를 양육하여 아들을 삼았더니 경이 시해를 당함에 이르러 갑기(甲騎)를 거느리고 회주에 와서 위에 올랐으며, 상서령(尙書令) 소사온(蕭思溫)의 연연(燕燕)을 들여보내게 하여 왕후로 삼았다. 현이 풍질(風疾)에 걸렸으므로 연연이 국사(國事)를 결정하였다.
황제가 친히 한(漢) 나라 북방을 정벌하므로 현이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게 하니 이계균(李繼筠)이 역습으로 반격하여 대파시켰다.
6년, 반역의 무리인 소가(小哥) 등을 체포하여 사형시켰다.
7년, 황제가 처음으로 조서(詔書)를 가진 사신을 보내니 현이 야율창(耶律昌)을 보내어 송 나라에 들어와 조회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이 교통하였으며 중 소민(昭敏)을 승니도총관(僧尼都摠管)으로 삼고 시중(侍中)을 더 겸하게 하였다.
8년, 탁주 자사(𣵠州刺史) 야율종(耶律琮)이 웅주(雄州)의 지방 장관 손전흥(孫全興)에게 편지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구하니, 황제가 명을 내려 허락하게 하자 현이 사신을 보내어 화해하게 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황제가 반미(潘美)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북한(北漢)을 정벌하게 하니 현이 사신을 보내어 군대를 일으킨 까닭을 묻게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하동(河東)이 명령을 거역하니 죄를 묻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만일 북한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화친한 언약을 옛날같이 지킬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뿐이다.” 하고 황제가 친히 북한을 정벌하기 위하여 진주(鎭州)에 군대를 주둔시키니, 현이 야율사(耶律沙) 등을 보내어 지원하게 하였으나 전쟁의 상황이 불리하여 죽고 다친 자가 많았었다.
황제가 북한의 왕 유계원(劉繼元)의 항복을 받고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를 취하고자 드디어 현이 야율휴가(耶律休哥)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자, 송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황제는 노거(驢車)를 타고 도망하였다. 현이 한광사(韓匡嗣)를 보내어 진주(鎭州)로 쳐들어가게 하였으나 도검할(都鈐轄)인 유정한(劉廷翰) 등이 그들을 크게 격파시켜 버렸다. 남원 추밀사(南院樞密使) 곽습(郭襲)이 사냥하는 것을 간하므로 가상히 여겨 그 말을 받아들였다.
5년, 소돌이(蕭咄李) 등이 안문(贗門)으로 쳐들어갔으나 대주 자사(大州刺史)인 양업(楊業)이 그들을 크게 격파시키니 현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가서 와교관(瓦橋關)을 포위하였으며, 휴가는 물을 건너서 전투를 하여 송 나라 군대를 크게 대패시키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방어하므로 현이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와서 휴가를 우월(于越)로 삼았는데 우월이란 아주 귀한 관직이다. 휴가는 지모가 뛰어나 병사들에게 경솔하게 송 나라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6년, 상경(上京)의 한 나라 군대가 협박으로 희은(喜隱)의 아들 유예수(留禮壽)를 왕으로 세우려 하니. 유수(留守)인 서실(徐室)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나 뒤에 희은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희은은 현의 종족으로 모반하였다가 잡혀서 감금당한 자였다.
7년, 현이 만성(滿城)에 쳐들어갔으나 패배하고 돌아왔다가 초산(焦山)에서 죽었다. 현이 사람을 임용하면 의심하지 않고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는 반드시 벌을 주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漢) 나라를 도와 주었기 때문에 군대는 격파당하여 많은 장수를 죽게 하였다. 향년이 35세이고 위에 있은 지 14년 만이었다. 연호를 보령(保寧)ㆍ건형(乾亨)이라 고치고 시호를 강정황제(康靖皇帝)라 하고 묘호를 경종(景宗), 묘호를 건릉(乾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융서(隆緖)가 위에 오르니 융서의 어릴 적 자는 문수노(文殊奴)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으로 봉하여졌는데 글씨와 그림과 음률을 잘했으며 시도 능하고 활쏘기도 잘하였다. 위에 오른 나이가 스무 살이므로 소후(蕭后)가 정사를 듣고 결단하였다.
8년, 국호를 다시 거란이라 하고 포령(蒲領)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삼경(三京)과 여러 곳에 부모가 있으면서 호적을 따로 하여 동거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이웃에서 염탐하고 서로 살피도록 하여 연대 책임을 지게 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사람과 3대(代)가 함께 사는 사람은 문려(門閭)를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사형이 이미 확정되고 판결이 정해진 자 중 원통함이 있는 자는 대(臺)에 나아가 하소연하게 하였다.
옹희(雍熙 송 태종의 연호) 2년(985, 고려 성종 4), 고려의 도로가 습(濕)하다 하여 여진(女眞)을 먼저 정벌하게 하였다.
3년, 서하(西夏)의 이계천(李繼遷)이 귀순하므로 그를 정난절도사(靖難節度使)로 삼았다. 황제가 조빈(曹彬)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안문(鴈門)으로 나아가니 융서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으면서 먼저 휴가 등을 보내어 여러 번 싸워 격파하자, 융서가 승리함을 기회로 대주(代州)를 침범하려 하니 장제현(張齊賢)이 그들을 격파시켜 물리쳤다.
단공(端拱 송태종의 연호) 원년(988, 성종 7), 융서가 연달아 만성(滿城)의 모든 군(郡)을 함락시키고 처음으로 주군(州郡)에서 준수한 자제(子弟)를 선발하여 추천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2년,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득신(馬得臣)이 격구(擊毬)하는 것을 간하자 가상히 여겨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야율휴가(耶律休哥)가 송 나라로 쳐들어 가니 순검사(巡檢使) 윤계륜(尹繼倫)이 그들을 당주(唐州)에서 격퇴시켰는데 휴가가 화살에 맞아 도망하더니, 이때부터 감히 쳐들어가지 못하였다.
순화(淳和 송 태종의 연호) 원년(990, 성종 9), 이계천을 봉하여 하국(夏國) 왕을 삼았다.
2년, 정난군절도사(靖難軍節度使) 이계봉(李繼捧)이 귀순하므로 서평왕(西平王)에 봉하였다. 이계천이 융서를 배반하고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3년, 소덕항(蕭德恒)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4년, 고려왕 왕치(王治)가 표문을 올려 죄를 청하고 여진과 압록강 동쪽의 땅 수백 리를 떼주었다.
5년, 처음으로 대명력(大明曆)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은 가준(賈俊)이 진상한 것이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회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읍(郡邑)에 유시하여 경술(經術)에 밝은 이와 재주가 뛰어난 이, 특이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고 고려에서 여악(女樂)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으며 놀고 먹는 백성이 없게 하였다.
지도(至道 송 태종의 연호) 원년(995, 성종 14), 한덕위(韓德威)가 당항(黨項)ㆍ늑랑(勒浪) 등 부족(部族)을 타일러 진무(振武)로부터 쳐들어가게 하니 영안 절도사(永安節度使) 절 어경(折御卿)이 그들을 자하차(子河汊)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고려에서 동자(童子) 열 사람을 보내와서 거란말을 배우게 하였다.
2년, 고려가 혼인하기를 요청하므로 소덕항(蕭德恒)의 딸을 고려에 시집 보냈다.
3년, 품부(品部)의 부유한 백성들에게 돈을 내게 권유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그리고 평지송림(平地松林)에서 사냥을 하였더니 어머니인 소씨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적 성인(聖人)의 말씀에 욕심을 마음껏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우리 아이가 천하의 임금이 되어 말을 달려 사냥을 하니 만에 한 번이라도 말이 성질을 부려 재갈이 벗겨지고 굴레가 부러져 수레가 뒤엎어지는 변고라도 생긴다면 나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그 사실을 깊이 경계하라.” 하였다.
함평(咸平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2년(999, 고려 목종 2), 융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가서 수성(遂城)을 포위하니, 그곳의 수비대장 양연소(楊延紹)가 굳게 지키므로 마침내 퇴각하면서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자 황제가 친히 그들을 방어하고 전연(澶淵)에 주둔하였다.
3년, 융서가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섰음을 알고 노략질한 것을 놓아 주고 퇴각하니, 범정소(范廷召) 등이 추격하여 막주(莫州)에서 크게 격파시켰다.
4년, 융서가 쳐들어가니 삼로도부서(三路都部署)인 왕현(王顯)이 수성에서 전투하여 2만여 명을 목베었다.
6년, 야율노과(耶律奴瓜) 등이 정주(定州)로 쳐들어가 부도부서(副都部署) 왕계충(王繼忠)을 사로잡아갔다.
경덕(景德 송 진종의 연호) 원년(1004, 목종 7), 융서가 그의 어머니 소씨와 통군(統軍) 소달름(蕭撻凜)과 함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가 전연(澶淵)을 포위하려 하였으나 달름이 쇠뇌에 맞아 죽었다. 황제가 친히 그들을 정벌하려고 전연에 주둔하여 북성문(北城門)으로 행차하였다. 처음에 항복한 장수 왕계충이 융서에게 화친하는 이로움을 말하고 가만히 표문을 올려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조서를 내려 계충을 타이르고 인해서 조이용(曹利用)을 파견하여 융서의 병영에 나아가게 하니. 융서가 한기(韓琦)를 시켜서 이용과 함께 와서 맹약을 요청하라 하였다. 이용이 말하기를 “융서가 남쪽의 땅을 관계하려 합니다.”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땅을 돌려줄 명분이 없다. 만일 꼭 부당하게 요구한다면 나는 마땅히 결전을 할 것이요, 만약 금과 비단을 얻고자 한다면 참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 하고 다시 이용을 보내면서 은(銀) 10만 냥과 명주 20만 필(匠)을 가져가게 하여 맹약을 성취시키고 돌아오니, 융서가 사신을 보내어 맹세하는 편지를 가지고 와서 형으로 섬기려 하였다. 황제가 이로부터 유시를 내려 예물로 해마다 교통하도록 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의 연호) 2년(1009, 목종 12), 융서의 어머니 소씨가 죽었다. 소씨가 임기응변하는 계략이 있어 대신들을 잘 거느렸으며, 다른 나라에 쳐들어갈 때는 갑옷을 입고 싸움을 독려하였고, 화친하는 데 이르러서도 역시 기발한 계략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
3년 고려에서는 강조(康兆)가 그의 임금인 송(誦)을 시해하고 마음대로 송의 형 순(詢)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므로 융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격파하여 강조를 사로잡으니, 동주(銅州)ㆍ곽주(霍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순이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기를 요청하므로 허락하고 정사사인(政事舍人)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으니, 고려의 수장(守將) 탁사정(卓思正)이 사신을 살해하고 한희손(韓喜孫) 등이 보우를 내쫓음으로 융서가 소배압(蕭排押) 등을 보내어 개성(開城)을 공격하니, 순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므로 마침내 개경을 불사르고 군대를 인솔하여 되돌아가더니 항복받은 성을 모두 고려에 되돌려주었다.
5년, 고려에서 채충순(蔡忠順)을 보내어 신하라 일컫기를 요청하므로 융서가 순에게 명하여 직접 조회하게 하였으나 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였다. 이보다 앞서 압록강 북쪽의 땅을 고려에 양도하였더니, 고려에서는 그곳에다 6성(城)을 쌓아 흥주(興州)ㆍ철주(鐵州)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귀주(龜州)ㆍ곽주(郭州)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순이 조회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노엽게 여겨 다시 타일러 6주를 반환하게 하고 귀주(龜州)에다 태학을 설치하고 그곳의 주민에게 교육을 시키니, 본디 신라에서 옮겨온 사람들로서 문자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7년, 해마다 야율자충(耶律資忠)을 사신으로 보내어 6주를 탈취하려 하였으나 고려에서 따르지 않으므로 소적렬(蕭敵烈)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에서는 여진과 함께 그들을 격파하였다.
9년, 야율세랑(耶律世郞) 등이 곽주(郭州)에서 고려와 싸워 크게 격파하고 돌아왔다.
천희(天禧 송 진종의 연호) 원년(1017, 고려 현종 8), 명을 내려 부녀의 재가(再嫁)를 금지시키고 소합탁(蕭合卓)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2년,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3년, 낭군(郎君) 갈불여(曷不呂) 등을 보내어 대군을 거느리게 하여 고려를 침략케 하니 고려왕 순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 바치기를 요청하므로 허락하였다.
4년,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칭하고 억류되어 있던 지랄리(只剌里)를 돌려 보내겠다고 요청하였는데, 지랄리가 6년 동안 고려에 있으면서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특별히 임아(林牙)에 임명하였는데, 임아란 한림(翰林)을 말한다.
건흥(乾興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22, 현종 13), 황제가 세상을 떠나니, 융서가 송 나라 제후국의 대신들을 모아 슬픔을 표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으며, 황제의 어령(御靈)을 안치하여 자복도량(資福道場)을 1백 일 동안 세워두게 하였다. 그리고 국내에 유시하여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고 황제의 휘(諱)함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바로잡도록 하였다.
천성(天聖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5년(1027, 현종 18), 모든 장원(帳院)의 서얼(庶蘖)에게 타일러서 일제히 그 어머니를 따라서 귀천(貴賤)을 따지게 하였다.
6년, 서얼 출신으로 이미 양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세습적으로 선발되는 벼슬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또 유시를 내리기를 ‘양국구(兩國舅)와 남ㆍ북 왕부(王府)는 일국의 귀족이므로 천인과 서얼은 본부관(本部官)에 임명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7년, 상은(詳隱)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효선(蕭孝先)을 가두어 버리고 새 나라를 건립하여 ‘흥요(興遼)’라 하였는데, 융서가 소효목(蕭孝穆)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게 하자 얼마 뒤에 연림이 잡혔다.
9년, 융서가 대복하(大福河)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융서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 슬퍼하여 몸이 야위어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연호 바꾸기를 요청하므로 융서가 말하기를 “연호를 바꾸는 것은 경사스러운 의식인데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길례(吉禮)를 시행하는 것은 불효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날로서 달을 계산하는 법은 옛날의 제도라고 요청하자 융서가 말하기를 “나는 거란의 황제이다. 차라리 옛날 제도를 어기더라도 불효하는 자식이 될 수는 없다.” 하였다. 병이 위독하여지자 아들 종진(宗眞)에게 말하기를 “송 나라와 맺은 맹세는 마땅히 준수하여 과실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하고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이 61세이고 위에 있은 지 49년 만이었다. 연호를 통화(統和)ㆍ개태(開泰)ㆍ태평(太平)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문무대효선황제(文武大孝宣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성종(聖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종진(宗眞)이 위에 오르니 종진의 자(字)는 이불근(夷不菫)이며 어머니는 원비(元妃)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에 봉하여졌는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다. 소씨의 이름은 누근(耨斤)인데 제천황후(齊天皇后) 소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아들 종진을 데려다 기르면서 사랑하기를 자기의 자식과 같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누근이 자기 스스로 황태후(皇太后)가 되어 정사를 청단(聽斷)하였다.
융서가 죽을 무렵에 종진에게 위촉하기를 “황후가 40년 동안 나를 섬겼는데 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너를 명하여 맏아들을 삼았으니, 너의 모자(母子)는 간절히 바라건대 그를 죽이지 말라.” 하였었다. 융서가 세상을 마침에 이르러 좌우들이 누근의 뜻을 받아 제천후의 동생이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누근이 죄인을 신문하여 다스리면서 제천후까지 연좌되게 하니 종진이 말하기를 “나를 어루만져 키워주신 분이 당연히 태후가 되셔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그분을 죄주려 하니 옳은 일입니까?”하였으나 누근이 끝내 그를 상경으로 내쫓았다.
명도(明道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32, 고려 덕종 1), 누근이, 종진이 설림(雪林)에 유람간 틈을 타서 사람을 상경에 보내어 제천후를 시해하게 하였다.
경우(景祐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34, 덕종 3), 누근이 가만히 여러 동생을 불러서 작은 아들 중원(重元)을 왕으로 세우기를 논의하였는데, 중원이 그와 같은 모의를 종진에게 알리자 종진이 마침내 누근으로부터 황제의 인장을 회수하였으며 그를 경주(慶州)에 거처하게 하고, 처음으로 친히 정무를 살피면서 중원을 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4년, 어머니인 누근을 경주에서 맞아들였다.
강정(康定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40, 고려 정종 6), 송 나라를 침략하려 하니, 북원추밀사(北院樞密使) 소효목(蕭孝穆)이 글을 올려 간절히 간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효목은 청렴하고도 근신하며 예의와 법도가 있어 늘 말하기를 “추밀(樞密)은 현명한 이들을 선발하여 놓는 곳인데 무슨 일을 성취시키지 못하겠느냐? 만일 자신이 자질구레한 일을 다 하려 한다면 큰일이 지체되어 나쁜 풍속을 개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요, 벼슬을 하면서 눈앞의 안일만을 탐하는 것은 신하의 본분이 아니다.” 하니 당시에 그를 칭찬하고 소중한 신하로 여겼다.
경력(慶曆 송 인종의 연호) 2년(1042, 정종 8), 소특말(蕭特末) 등을 보내와서 관남(關南)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나라 안이 무사하므로 분을 내어 남쪽으로 침략할 의사를 가지고 송 나라에 대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하(夏) 나라를 정벌한 사실과 병기와 군영(軍營)을 증가시킨 까닭을 문의하였다. 황제가 부필(富弼)을 보내어 땅을 베어달라는 요구에 대하여 물어보자 종진이 말하기를 “송 나라가 약속을 어기어 안문(鴈門)을 막고 민병(民兵)의 명부를 작성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땅을 요구해 보고 주지 않을 때 군대를 동원하여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다.
필이 반복하여 그러한 처사가 옳지 않음을 진술하고 돌아가서 모두 보고하니 다시 필을 사신으로 삼아 화친을 맺는 것과 예물을 증가시키는 것 두 가지 의견을 소지하게 하여 보내니, 종진이 예물을 증가시키겠다는 서약서는 보류하여 두게 하고 야율인선(耶律仁先) 등을 시켜서 필과 함께 와서 해마다 돈 10만 냥과 명주 10만 필을 증가시키도록 의논하게 하였다. 황제가 정조사(正朝使)와 수절사(壽節使)를 보내어 사처에 머무르게 하였더니, 종진이 변장을 하고 가보았다.
4년 초, 국사(國史)를 편수하게 하고 야율곡욕(耶律谷欲)과 야율서성(耶律庶成) 등을 명하여 사관으로 보충시켰다. 처음에 종진이 당항(黨項)을 정벌하니 하주(夏主) 이원호(李元昊)가 그들을 구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곳의 병사와 장수를 징발하여 종진이 직접 원호를 토벌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고하기를 “송 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부디 화친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종원(宗元) 등을 보내어 원호를 토벌하니, 원호가 그들을 맞아 싸워 패배시켰다. 얼마 있다가 포로와 노획한 것을 돌려주었더니, 종진이 드디어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와서 운주(雲州)를 서경으로 삼았다.
6년, 임아(林牙) 소한가노(蕭韓家奴)에게 유시하여 예서(禮書)를 찬술(撰述)하게 하였다.
7년, 공주(公主)가 시부모에게 며느리로서 예절 행하는 법을 정하였다.
황우(皇祐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49, 고려 문종 3), 종진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하(夏) 나라를 토벌하였는데 야율적로고(耶律敵魯古)가 하란산(賀蘭山)에 이르러 원호의 처(妻)를 사로잡아왔다. 그리고 동생이 형을 따라 강도 노릇 하는 자가 있었는데 함께 자식이 없으므로 특별히 그 동생을 용서하여 주었다.
2년, 중 혜감(惠鑑)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해 주었다.
3년, 원호의 처를 소주(蘇州)에 가두어 두었다.
4년, 하 나라와 화친하였다. 종진이 대신에게 유시하여 말하기를 “내가 송 나라의 임금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그의 초상화를 보고 싶으니 타일러 사신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지화(至和 송 인종의 연호) 원년(1054, 문종 8), 8방(房)의 친족에게 명령하여 두건을 쓰도록 하였다.
2년, 사신을 보내어 건원절(乾元節)을 축하하게 하고, 요 나라 3대 임금의 초상화를 바치고 황제의 초상화를 청구하였다. 그리고 송 나라 사신을 불러 낚시질하며 시를 짓게 하였고, 추산(秋山)에 유람갔다가 몸이 아파서 연조국왕(燕趙國王) 홍기(洪基)를 불러 나라 다스리는 요령들을 타이르고 5방(坊)의 응(鷹)과 골(鶻)을 놓아 주었으며 낚시하는 기구를 태워버리고 세상을 마쳤다.
종진은 성품이 경박하여 늘 밤에 연회를 틈타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대열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변장을 하여 주점과 불사(佛寺)ㆍ도관(道觀)에 드나들었으나 중[浮屠]을 더 중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친히 진사(進士)들에게 과제(課題)를 내주었으며 조례와 제도를 대폭으로 마련케 하여 아래로 모든 선비와 서민들에게까지 편의(便宜)를 진술하게 하였으니 나라가 올바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의지가 절실하였다고 하겠다. 향년이 40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연호를 개원(開元)ㆍ경복(景福)ㆍ중희(重熙)라 고쳤으며 시호를 신성효장황제(神聖孝章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흥종(興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홍기(洪基)가 위에 오르니 홍기의 자는 열린(涅隣)이고 어릴 적 자는 사랄(査剌)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에 봉하여졌다가 진급하여 연조국왕(燕趙國王)으로 책봉되었는데 천성이 침착하고 안정되었으며 엄숙하고 굳세어 매일 조회할 때면 종진이 용모를 단정히 하였으며, 종진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여 정사를 청단(聽斷)하지 않으므로 모든 각료들이 굳게 요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그리고 유시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윗자리에 앉아 지혜와 학식이 따르지 못하며, 여러 아랫사람들을 신임하지 못하며, 세금을 제멋대로 부과하며, 상주고 벌주는 것이 기준에 맞지 않을까 두려우니, 너희 모든 선비와 서민들은 바른말을 거리낌없이 하라.” 하였다.
또 유시를 내려 공훈을 세운 후예자와 이리근(夷离菫)ㆍ부사(副使), 기타 내직의 여러 곳에서 일보는 사람이 아니면 관(冠)과 건(巾)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중원(重元)을 황태숙(皇太叔)으로 삼아 절을 하지 않게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좌이리필(左夷离畢)에게 말하기를 “내가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바른말을 들어서 과실을 바로 잡고자 하였었는데, 벌써 두어 달이 지나도록 가까운 신하들에게 위임한 의사에 부응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실을 내외의 백관들에게 명하여 각자 한 가지씩 말하게 하되 귀천(貴賤)과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모두 바른말을 거리낌없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태학을 설립하여 선비를 길러내게 하고 5경(經)의 전(傳)과 소(疏)를 나누어 주고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배치하였다.
가우(嘉祐 송 인종의 연호) 2년(1057, 고려 문종 11) 초, 종진이 황제의 초상화를 얻으려 하다가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가, 이때에 와서 홍기가 자기의 초상화를 바치고 인하여 황제의 초상화를 요구하였다. 황제가 호숙(胡宿)을 사신으로 자기의 초상화를 받들게 하여 그에게 화답을 하자, 홍의가 의장(儀仗)을 구비하여 맞아보고는 놀라고 숙연해져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말이나 몰고 일산(日傘)이나 가지고 다니는 한 제후국의 산택(山澤) 담당 관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5년, 국사 편찬을 감독하던 야율백(耶律白)이 그들 임금의 시부(詩賦)를 순차에 따라 편찬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그것을 인하여 백에게 서문(序文)을 짓게 하였다.
7년, 동경 유수(東京留守)인 소하랄(蕭河剌)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였으며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자질이 있었는데, 당시 정치의 부합된 점과 모순된 점을 진술하였더니, 홍기가 노엽게 여겨 그를 죽였다.
8년, 황태숙 중원이 북추밀사(北樞密使) 소호도(蕭胡覩) 등과 함께 노수군(拏手軍)을 유인하여 태자(太子) 산행궁(山行宮)을 침범하게 하니, 남원 추밀사 야율인선(耶律人先) 등이 군대를 인솔하여 그들을 방어하였다. 홍기의 어머니 소씨는 궁중을 지키던 군대를 독려하여 중원의 아들 열로고(涅魯古)를 죽이고 반역한 무리들의 가족을 멸족시키니, 중원이 대막(大漠)으로 도망하여 자결하였다.
치평(治平 송 영종(宋英宗)의 연호) 원년(1064, 문종 18), 남경(南京) 백성들에게 물을 터서 벼 심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또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자 간행을 금지시키고, 명을 내려 건문각(乾文閣)에 누락된 경서(經書)를 구하여 유신(儒臣)들에게 교정을 당부하였다.
홍기가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유람을 갔었는데, 어머니 소씨가 활을 쏘아 호랑이를 잡아서 여러 신하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게 하고 명령을 내려 각각 시를 짓게 하였다.
3년, 다시 나라 이름을 요(遼)라 고쳤다.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원년(1068, 문종 22), 영을 내려 남경에 군사도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모두 벼를 심게 하였다.
3년,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영을 내려 이 과에 응시하는 자는 먼저 전공한 부분에 대한 십만 언(十萬言)을 진상하게 하였으며, 마희백(馬希白)이 시 짓는 재능이 민첩하고 정묘하여 열 사람의 관리가 받아써도 못 따른다 하므로 그를 불러서 시험하였다.
4년, 무명 옷감과 명주 옷감의 길이가 짧고 넓이가 좁아 척도(尺度)에 맞지 않게 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부처의 유골(遺骨 사리(舍利)를 말함)을 초선부도(招仙浮圖)에 안치하고 사냥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도살을 금지시켰다.
5년, 경주(慶州)의 근문고(靳文高)가 8세(世)를 함께 살았으므로 벼슬을 내려 주었으며, 눈이 많이 내려 백성들에게 금지 구역에도 들어가 땔나무를 하도록 허락하였다.
8년, 황제가 심괄(沈括)을 보내어 국경을 정하게 하였다. 홍기의 왕후인 소씨(蕭氏)가 자태와 용모가 아름답고 시(詩)도 잘하며 음악도 좋아하더니 태자(太子) 준(濬)을 낳았다. 그 무렵 북원 추밀사 야율을신(耶律乙辛)이 정치를 제멋대로 하면서 왕후의 총명하고 민첩함을 꺼려하여 이에 궁비(宮婢) 단등(單登) 등에게 왕후가 음악 담당관인 조유일(趙惟一)과 사통하였다고 무고하게 하고 을신이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유일을 멸족시키고 왕후에게는 자결하게 하였다.
9년, 홍기가 기거주(起居注)를 보려 하였는데 수주랑(修注郞) 불전(不攧)과 홀돌근(忽突菫) 등이 진상하지 않으므로 각각 곤장을 쳐서 파면시켰다.
10년, 을신이 태자 준을 시해하였다. 준이 학문을 좋아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그 당시 을신이 벌써 준의 어머니에게 해를 입히고는 그들의 무리인 소하말(蕭霞抹)의 누이를 왕후로 삼고 또 준을 해치려 하니, 호위(護衛)인 소홀고(蕭忽古)가 그 상황을 알고 을신을 죽이려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을신이 소화도알(蕭訛都斡) 등에게 명하여 홀고 등이 을신을 죽이고 준을 세워 황제를 삼으려 계략을 꾸몄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준을 폐하여 평민으로 만들어 상경(上京)으로 옮기게 하고, 그 사건에 연루된 신하들을 모두 살해하고, 을신이 사람을 보내어 준을 살해하고는 거짓으로 병사한 것처럼 하고, 다시 준의 비(妃)를 죽였다. 홍기가 뒤늦게 준이 원통하게 죽은 것을 알고 추시(追諡)하여 소회태자(昭懷太子)란 시호를 내렸다.
원풍(元豐 송 신종의 연호) 원년(1078, 문종 32), 제로(諸路)의 반승니(飯僧尼)가 36만 명이 된다고 아뢰었다.
3년, 준의 아들 연희(延禧)가 겨우 여섯 살이 되었는데 을신이 또 그를 해하려고 인하여 말하기를 “송 위왕(宋魏王) 화로알(和魯斡)의 아들 순(淳)을 황태자로 삼을 만합니다.” 하였으니, 화로알은 곧 홍기의 동생이었다.
그러자 북원 선휘사(北院宣徽使) 소올납(蘇兀納) 등이 간하기를 “적통(嫡統)을 버리고 세우지 않음은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하자, 홍기가 미심쩍게 여겨 결정을 못하다가 흑산(黑山)에 사냥하러 가서 왕의 행차를 뒤따르는 관속들이 많이 을신을 수행하는 것을 본 뒤에야, 을신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여 흥중부(興中府)로 내쫓고 그의 무리들을 모두 물리쳐 버렸으며, 그 뒤에 을신을 내주(萊州)에 가두었다. 그리고 연희를 책봉하여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4년, 부마(駙馬) 소수알(蕭酬斡)의 사제(私第)에 행차하여 술을 마셨더니, 재상 양영(梁穎)이 간하기를 “천자는 신하의 집에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곧 대궐로 돌아왔다.
5년, 거서(秬黍)로 정한 되[升]와 말[斗]의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후비(后妃) 소씨(蕭氏)를 강등시켜 혜비(惠妃)라 하였다. 그의 어머니 연국부인(燕國夫人)이 염매(厭魅 주술(呪術)로 남을 저주하는 것)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비(妃)의 직위를 낮추어 서인이 되게 하여 의주(宜州)에 가두었다.
6년, 을신이 송 나라로 도망을 꾀하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중 선지(善知)를 시켜 고려에서 보내온 불경을 교정하도록 하고 널리 펴 시행하게 하였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원년(1086, 고려 선종 3), 임시 한림학사(翰林學士) 조효엄(趙孝嚴)과 지제고(知制誥) 왕사유(王師儒) 등을 불러서 오경(五經)의 대의(大義)를 강의하게 하였다.
4년, 학자들에게 필수로 도(道)를 밝히고 경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7년, 생여진부 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 핵리발(劾里鉢)이, 병이 위독하여 그의 아우인 영가(盈哥)에게 말하기를 “거란에 관한 일들을 잘 분별하여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은 둘째 아들 아골타(阿骨打)뿐이다.” 하고 세상을 마쳤다.
핵리발은 위엄스럽고 신중하며 지혜가 많아, 약한 것을 변경시켜 강하게 만들었으므로 창업 기반이 처음으로 커졌다.
소성(紹聖 송 철종의 연호) 3년(1096, 고려 숙종 1), 세마(洗馬) 유휘(劉煇)가 글을 올리기를 “구양수(歐陽脩)가 《오대사(五代史)》를 편찬하면서 우리 요 나라를 사이(四夷)에 부속시켜 제멋대로 깎아내려서 헐뜯었으며, 또 송 나라는 요 나라를 의뢰하여 외국과 교통하며 화친을 맺어 형제국으로서의 예를 극진하게 하였는데도, 이제 와서 도리어 신하를 시켜 망령스럽게 사서(史書)를 저작하게 하고 관심을 갖지 않으니, 신은 바라옵건대 송 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의 사적을 자세하게 국사에 덧붙이게 하십시오.” 하니,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예부 낭중(禮部郎中)으로 전직시켰다.
4년, 하(夏) 나라 사람이 와서 송 나라가 요새에다 성을 쌓는다고 하자, 흥기가 사신을 보내어 하 나라와 화친하기를 요청하였다.
원부(元符 송 철종의 연호) 3년(1100, 숙종 5), 유사(有司)가 관아의 공문서에 송 나라 황제의 ‘사위(嗣位)’를 ‘등보위(登寶位)’라 썼다 하여 재상 정전(鄭顓) 이하의 관원의 직위를 삭탈하였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송 철종의 연호) 원년(1101, 숙종 6), 홍기가 혼동강(混同江)에서 세상을 마쳤다. 홍기가 처음 즉위하여 바른말을 요구하고 다스리는 도리를 문의하였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정이 다투어 일어나는 데 이르러서는 자기의 동기(同氣)도 보호하지 못하였으며, 여러 부족이 배반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므로 편안한 해가 없었다. 향년이 70세이고 위에 있은 지 47년 만이었다. 연호를 청녕(淸寧)ㆍ함옹(咸雍)ㆍ태강(太康)ㆍ태안(太安)ㆍ수륭(壽隆)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인성대효문황제(仁聖大孝文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도종(道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손자 연희(延禧)가 위에 오르니 연희의 자(字)는 연녕(延寧)인데 어릴 적 자는 아과(阿果)이다. 준(濬)의 아들로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다가 진급하여 연국왕(燕國王)에 책봉되었고 즉위하여 처음으로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
그리고 명을 내려 을신에게 죄없이 모함된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벼슬을 복직시켜 주게 하였으며, 관에서 몰수한 재산을 되돌려 주게 하고 귀양간 사람들을 되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황제ㆍ황후라 하였다. 생여진부 절도사 영가가 죽고 위를 형의 아들인 오아속(烏雅束)에게 전하였는데, 오아속이 죽자 그 아우 아골타가 위를 이어받았다.
숭녕(崇寧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원년(1102, 숙종 7), 을신의 도당을 죽이고 그들의 자손들을 변방으로 옮기게 하고 을신의 관(棺)을 쪼개었으며, 그들의 가속(家屬)들을 을신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년, 연희가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시찰하였다. 그리고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하 나라를 정벌하지 말도록 요청하니, 황제가 한림학사 임여(林攄)를 보내어 회답하게 하였다.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1, 고려 예종 6), 황제가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 정윤중(鄭允中)과 환관 동관(童貫)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처음에 임여가 귀국하여 요 나라의 내부가 단결되지 않고 있으니 정벌할 만하다고 말하므로 황제가 처음으로 북벌할 뜻을 두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관 등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마식(馬植)이 연희에게 벼슬하여 광록경(光祿卿)이 되었는데 몰래 동관을 찾아보고 요 나라를 멸망시키는 계책을 진언하므로, 관이 그를 데리고 귀국하여 성명을 이양사(李良嗣)라 고쳤더니, 황제가 조씨(趙氏) 성(姓)을 하사하였다.
2년, 연희가 혼동강에 갔었는데 생여진의 추장(酋長)들이 모두 와서 조회하고 두어연(頭魚宴)에 참여하면서 주흥이 한창일 때 연희가 추장들에게 명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라고 하였더니, 아골타만이 춤을 못 춘다고 사양하므로 두세 번 타일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연희가 비밀로 북원 추밀사 소봉선(蕭奉先)에게 유시하여 “국경의 일을 청탁하고 그를 죽여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뒷날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봉선은 생각하기를 “그는 예의를 모르고 또 큰 잘못이 없는데 죽인다면 덕화를 사모하는 마음을 다치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자 연희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자 아골타는 언희가 다른 뜻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의심하였고, 또 연희가 심한 주정 때문에 나라 정치를 구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병을 핑계로 다시 오지 않았다.
4년, 초에 여진이 군대를 일으켜 흘석열부(紇石烈部)의 사람 아소(阿疎)가 복종하지 않는다고 성토하니, 아소가 도망을 왔었는데 이때에 와서 아골타가 사람을 보내어 아소를 찾아내려 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으므로 아골타가 마침내 여러 부족의 군대를 모집하여 은출할(銀朮割) 등을 장수로 삼아 요 나라의 잘못을 하나하나 책망하여 하늘과 땅에 고한다 하고 영강주(寧江州)를 진격하니, 연희가 사공(司空) 소사선(蕭嗣先) 등을 보내어 그들을 막게 하였으나 아골타가 연달아 싸워 크게 격파시켰다.
요 나라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여진의 군대가 1만 명만 되면 겨루지 못한다.” 하더니,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1만 명이 되었다고 하였다.
5년, 아골타가 황제라 자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연희가 사신을 금에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아골타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여 와서 야율알리타(耶律斡里朶) 등과 싸웠는데 달로고성(達魯古城)에서 패배시켰다. 연희가 또 사신을 보내 빨리 항복하라고 타이르자 아골타도 항복하기를 타이르는 회답을 보내오므로, 연희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려고 어영도통(御營都統) 소봉선(蕭奉先) 등을 선봉으로 야율장노(耶律章奴)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는데, 장노가 배반하여 상경(上京)으로 도망하여 종실(宗室) 위국왕(魏國王) 순(淳)을 맞아 왕으로 세우기를 계획하고 왕비의 친동생인 소체리(蕭諦里)를 보내어 순을 설득시켰으나, 순이 소체리의 목을 베어 바쳤다.
이에 장노가 광평정(廣平淀)에 나아가 행궁(行宮)을 침범하고, 인하여 여진으로 도망하였으나 순라군에게 잡혀서 왕이 머무는 곳으로 압송되었다가 허리를 잘려 죽었다. 연희가 타문(駝門)에 이르니, 소특말(蕭特末) 등이 기마병(騎馬兵)과 보병(步兵) 45만을 거느리고 알인락(斡隣濼)에 도착하여 있었다. 그 즈음 연희가 장노의 배반 때문에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였더니, 아골타가 추격하여 크게 격파시키자 도감(都監) 야율장가노(耶律張家奴)가 배반하였다.
6년, 동경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유수(留守) 소보선(蕭保先)을 살해하자, 보선의 비장(裨將) 고영창(高永昌)이 요양(療陽)을 근거지로 국호(國號)를 참칭하고 연호를 세우므로 연희가 소한가노(蕭韓家奴)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니, 장가노가 고주(高州)를 함락시키므로 연희가 직접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아골타가 고영창을 공격하여 죽이고 동경(東京)의 주현(州縣)을 모두 탈취하였다.
7년, 연희가 음량하(陰凉河)에 가서 요동(遼東) 사람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어 여진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고 이름을 원군(怨軍)이라 하였는데, 8영(營)이나 되었다. 위주(衛州) 질려산(蒺藜山)에 주둔하였더니 금 나라 사람들이 질려산을 공격하여 깨뜨리고는, 끝내 현주(顯州)ㆍ건주(乾州)ㆍ의주(懿州) 등 7주(州)를 모두 빼앗았다.
철주(鐵州) 사람 양박(楊朴)이 아골타에게 예부터 영웅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 꼭 먼저 대국에 봉책을 요구하여야 한다고 설득시켰더니,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논의하고 봉책하여 주기를 요구하였다.
중화(重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8, 예종 13), 황제가 무의대부(武義大夫) 마정(馬政)을 금 나라에 보내어 친선을 도모하게 하고 함께 요 나라를 정벌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런데 연희가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더니, 아골타의 답서에 금 나라를 형으로 섬기고 해마다 방물바칠 것을 요청하였다.
선화(宣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1119, 예종 14), 아골타가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요 나라를 협공할 것을 타일렀다. 그리고 소재(少宰) 왕보(王黼)가 화학정(畫學正) 진요신(陳堯臣)을 추천하여 요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더니, 요신이 연희의 초상화를 그려서 귀국하여, 황제께 말하기를 “관상보는 법으로 논한다면 그의 멸망이 조석(朝夕)에 달렸습니다.” 하면서 그 나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그려서 함께 올렸다.
연희가 사신을 보내어 아골타를 책봉하여 동회국(東懷國) 황제로 삼았다. 이에 앞서 일곱 차례나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책봉하는 예를 의논하였고 금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환영하였으나, 도착한 책봉서에 형으로 섬긴다는 내용은 없고 또 대금(大金)이라는 호칭도 않고 동회라 하였으니, 이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덕화를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하여, 그들의 어긋난 예의를 책망하면서 받지 않았다.
2년, 이보다 앞서 연희가 사신에게 책봉한 초고(初藁)를 소지케 하여 금 나라에 보내니, 금 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낼 때 책봉한 부본을 가져가게 하여 회답을 하였는데, 연희가 금 나라에서 정한 대성(大聖) 두 글자는 자기 선대의 칭호를 범하였다 하여 사신을 보내어 가서 의논하게 하자, 아골타가 노하여 외교관계를 끊고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상경(上京)을 공격하였더니, 유수 소달불야(蕭撻不也)가 나와 항복하였다. 제가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함께 요 나라 공격하기를 약속하였다.
3년, 연희의 아들이 넷이었는데 장남은 조왕(趙王) 습니열(習泥烈), 차남은 진왕(晉王) 오로알(敖盧斡), 다음은 진왕(秦王) 정(定), 다음은 허왕(許王) 영(寧)이었다. 당시 여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연희가 사냥놀이를 하므로 진왕(晉王)의 어머니인 문비(文妃) 소씨가 노래를 지어 풍자하여 간(諫)하였다.
추밀사 소봉선(蕭奉先)은 원비(元妃)의 오라버니로 진(秦)ㆍ허(許) 두 왕의 외삼촌이었는데, 진왕(晉王)이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으므로 진왕(秦王)이 위에 오르지 못할까 하여 가만히 계책을 꾸몄다. 문비의 언니가 야율달갈리(耶律撻曷里)에게 시집갔으며 동생은 야율여도(耶律余覩)에게 시집을 갔었다. 봉선 등이 문비와 부마(駙馬) 소욱(蕭昱)과 여도ㆍ달갈리 등이 진왕(晉王)을 세우려고 계책을 꾸민다고 무고하자 연희가 욱과 달갈리 그리고 문비를 죽였는데, 마침 여도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겁을 먹고 금 나라에 항복하였다. 아골타가 여도를 길잡이로 삼아 중경(中京)으로 향했다.
4년 여도가 누실(婁室)을 인도하여 갑자기 이르니 연희가 매우 걱정을 하므로 봉선이 말하기를 “여도가 이번에 온 것은 자기의 생질인 진왕(晉王) 때문이니 그를 죽여 버리면 여도가 저절로 돌아갈 것입니다.”하였다. 때마침 야율살팔(耶律撒八) 등이 진왕을 세우려고 계략을 꾸몄다가 사실이 발각되었으므로 연희가 드디어 진왕을 죽였는데, 이 때문에 인심이 흩어졌다.
금 나라 군대가 원앙락(鴛鴦濼)에 있는 행궁(行宮)을 핍박하자 연희가 운중(雲中)으로 도망하였는데 점몰갈(粘沒喝)이 추격해오므로 연희가 협산(夾山)으로 들어갔다. 연희는 그제야 봉선의 충성스럽지 못함을 깨닫고 노여워서 말하기를 “나를 따르지 말라.” 하자 봉선이 절하고 떠나가더니, 그 부하에게 잡혀서 묶이어 금 나라 군대에 압송되었는데 연희가 다시 잡아서 죽였다. 처음에 연희가 운중으로 도망갈 때 유임된 남부재상(南部宰相) 장임(張琳)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처온(李處溫)이 진진국왕(秦晉國王) 순(淳)과 함께 연경을 지켰었는데, 이때 이르러 처온이 대신(大臣)인 야율대석(耶律大石) 등과 함께 순을 옹립하고 연호를 건복(建福)이라 하니, 이것이 세상에서 일컫는 북요(北遼)이다. 얼마 지나 연희를 강등시켜 상음왕(湘陰王)으로 삼았다. 금 나라 사람이 와서 요 나라를 협공하자고 약속하므로 황제가 동관을 명하여 하북하동로 선무사(河北河東路宣撫使)로 삼아서 대응하게 하였는데, 금 나라 사람들이 서경을 탈취하자 사막(沙漠) 이남의 부족(部族)들이 모두 항복하니, 연희가 와사열(訛莎烈)로 도망하였다.
사신을 보내와서 동관에게 말하기를, “여진이 배반하는 것은 남조(南朝 송을 말함)도 미워할 것인데 백 년간의 화친을 포기하고 뒷날의 재화(災禍)를 장만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느냐? 재난에서 건져내며 이웃을 구휼하여 주는 것이 고금을 통한 도의이니 대국(大國)은 생각하여 보라.” 하니, 동관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순(淳)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는데 연희가 격문을 천덕(天德) 등의 주(州)에 전하였음을 듣고 매우 걱정스럽게 여겨 대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처온(處溫) 등이 진왕(秦王 연희의 아들 정(定)을 말함)을 맞아들이고 상음(湘陰 상음왕 연희를 말함)은 거절하자는 의견을 말하니, 야율영(耶律寧)이 말하기를 “진왕과 상음왕은 부자간이다. 어찌 아들을 맞아들이고 아버지는 거절한단 말인가?” 하자, 처온이 영을 죽이려 하매, 순이 말하기를 “충신은 죽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윽고 순이 죽자 군중들이 순의 처 소씨를 세워서 황태후로 삼았다. 얼마 지나 연희의 셋째 아들인 진왕 정(定)을 세워 황제를 삼고 연호를 덕흥(德興)이라 하였으며, 순에게 시호를 내려 효장황제(孝章皇帝)라 하였다. 처온이 화를 입을까 겁을 내어 남으로는 송 나라와 통모하고 북으로는 금 나라와 통모하여 내응하려고 하였으므로 황후가 그를 잡아서 죽였다. 아골타가 연희를 석련역(石輦驛)까지 뒤쫓아가자 연희가 낙곤수(落昆髓)로 도망하였다.
곽약사(郭藥師)가 탁(𣵠)ㆍ이(易) 두 고을을 거느리고 투항하자 동관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아골타가 연경(燕京)을 침입하자 소후(蕭后)가 천덕군(天德軍)으로 도망하였다.
5년, 북원추밀사 해왕(奚王) 회리보(回离保)가 스스로 위에 올라 해국황제(奚國皇帝)라 하더니 뒤에 자기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연희가 남경(南京)이 격파되었음을 듣고 사부족(四部族)으로 도망하였는데, 소후가 와서 뵈었더니 연희가 노하여 그를 죽이고 추존하였던 순(淳)을 강등시켜 서인이 되게 하였다.
금(金)의 알리불(斡离不) 등이 거용관(居庸關)에 이르러 야율대석(耶律大石)을 사로잡아 그를 길잡이로 응주(應州)에 있었던 연희를 습격하니, 진(秦)ㆍ허(許)의 두 왕과 여러 왕비 그리고 공주와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잡혔는데, 특모가(特母哥)가 연희의 둘째 아들 아리(雅里)와 몰래 연희의 진영으로 갔었다. 연희가 운내(雲內)로 도망하였더니 하왕(夏王) 이건순(李乾順)이 사신을 보내어 연희에게 자기 나라로 오기를 청하였다. 소특렬(蕭特烈)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금숙군(金肅軍)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특렬 등이 아리를 겁박하여 서북부(西北部)로 도망하게 하여, 그를 세워 황제로 삼고 연호를 신력(神曆)이라 하였다.
처음에 장각(張殼)이 평주사(平州事)를 맡아 군대를 훈련시켜 대비하였는데 금 나라 사람들이 평주를 승격시켜 남경을 삼고, 각에게 평장판유수사(平章判留守事)를 더하여 주었다. 이때에 와서 금 나라 사람들이 포로로 잡은 재상 좌기궁(左企弓) 등을 데리고 연경의 부호들과 함께 동으로 이사하게 하였는데, 그 길이 평주를 지나가게 되자 각의 휘하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이 만약 의(義)를 가지고 왕을 보좌하여 요(遼)를 다시 일으킬 것을 계획한다면, 먼저 기궁 등을 죽이고 연(燕) 나라 백성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평주(平州)를 송 나라에 돌려준다면 끝내는 울타리가 될 것이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니, 각이 마침내 기궁 등을 죽이고 연희의 초상을 그려 조석으로 배알하고 모든 일은 알린 뒤에 시행하였다. 이윽고 송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황제가 명을 내려 벼슬을 후하게 더하여 주고 위로하였다. 뒤에 알리불(斡离不)에게 패배하자 황제가 죽이도록 명하고 그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금 나라에 주었다.
처음에 금 나라 사람이 연경을 함락시키자 소알(蕭斡)이 해왕부(奚王府)에 나아가 스스로 위에 올라 신성황제(神聖皇帝)라 하면서 연달아 경주(景州)ㆍ계주(薊州)를 함락시키더니, 얼마 지나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금주(金主) 아골타가 세상을 마치고 아우 오걸매(吳乞買)가 위를 이었으며, 야율대석이 금에서 돌아오자 연희가 그를 석방시켜 주고 연희도 돌아와 돌여불부(突呂不部)에서 기거하였다. 아리(雅里)가 죽자 소특열 등이 다시 종진(宗眞)의 손자 구열(求烈)을 왕으로 세웠더니, 뒤에 반란병에게 살해당하였다.
6년, 연희가 마가군(馬哥軍)에 이르렀다가 금인(金人)의 습격으로 오적렬부(烏敵烈部)로 도망하여 재차 군사를 동원하려 하므로, 대석이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대석이 끝내 자기가 왕이 되었다. 연희가 금 나라와 싸우다가 패배하여 산음(山陰)으로 도망하였다.
7년, 당항(黨項)의 소곡록(小斛祿)이 연희에게 자기 땅으로 오라고 요청하였다. 천덕(天德)에 이르러 눈을 만나 식량이 떨어졌는데 야율출자(耶律朮者)가 보리가루와 대추를 진상하였으며, 연희가 휴식하려 하면 출자가 꿇어앉아 자기에게 기대게 하였다. 밤이 되어 민가에 유숙하려고 정탐하러 온 기병이라고 속여 말했으나 그집에서 알아차리고 말머리를 어루만지며 꿇어앉아 크게 슬퍼하였는데, 연희가 며칠 동안 기거하면서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절도사를 제수하였다.
그 뒤 응주에 이르러 금 나라 장수 누실(婁室)에게 잡혔는데, 뒤에 강등되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하여졌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연호를 건통(乾統)ㆍ천경(天慶)ㆍ보대(保大)라 고쳤으며 스스로 천조황7제(天祚皇帝)라 하였는데, 금에서 예왕(豫王)으로 고쳐 봉하고 여양(閭陽) 건릉(乾陵) 곁에 장사지냈다.
야율대석의 자는 중덕(重德)이니 아보기의 8세 손으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림응봉(翰林應奉)으로 뽑혔다가 요흥군절도사(遼興軍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연희가 쫒겨다닐 때 대석이 진진왕(秦晉王) 순을 옹립하였으며 순이 죽자 연희가 대석을 책망하였으나 석방하여 주었고, 대석이 연희에게 금 나라와 싸우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추밀 소을설(蕭乙薛)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어 서쪽으로 도망하여 가돈성(可敦城)에 이르렀다.
정강(靖康 송 흠종(欽宗)의 연호) 원년(1126, 고려 인종 4), 회골왕(回鶻王) 필륵가(畢勒哥)가 그를 맞아주었고, 국경 밖까지 전송하여 주었으며 군대가 만리를 행진하였다. 기아만(起兒漫)에 도착하여 황제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서요(西遼)이다.
2년, 동으로 돌아가 호사알이타(虎思斡耳朶)에 도성(都城)을 쌓았다.
소흥(紹興 송 고종(高宗)의 연호) 6년(1136, 인종 14),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0세이고 위에 있은 지 12년 만이었다. 연호를 연경(延慶)ㆍ강국(康國)이라 고쳤으며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하였다. 아들 이열(耳列)이 어리므로 처 소씨(蕭氏)가 대신 정사를 보았는데, 이름은 탑불연(塔不煙)이고 호(號)를 감천황후(感天皇后)라 하였다.
12년, 세상을 떠나니 섭정한 지 7년 만이었다. 연호를 함청(咸淸)이라 하였다. 이열(夷列)이 위에 올랐다.
22년, 세상을 마치니 위를 참칭한 지 13년 만이었다. 연호를 소흥(紹興)이라 고치고 묘호를 인종(仁宗)이라 하였다. 아들이 어리므로 누이 보속완(普速完)에게 유언으로 명하여 섭정하게 하였는데, 호를 승천태후(承天太后)라 하였다.
뒤에 부마 소타노불(蕭朶魯不)의 아우 박고지사리(朴古只沙里)와 통간하고 인하여 부마를 살해하였다.
건도(乾道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4년(1168, 고려 의종 22), 부마의 아버지 소알리랄(蕭斡里剌)이 보속완을 쏴 죽였는데 섭정한 지 15년 만이었다. 연호를 숭복(崇福)이라 고쳤다. 이열의 둘째 아들 직노고(直魯古)가 위에 올랐다.
가태(嘉泰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원년(1201, 고려 신종 4), 사냥을 갔었는데 내만왕(乃蠻王) 굴출률(屈出律)이 군사를 잠복시켜 사로잡게 하여 그의 왕위를 차지하고는 직노고를 추존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았다. 얼마 후 세상을 마치니 위에 있은 지 34년 만이었다. 연호를 천희(天禧)라 고쳤으며 요 나라가 망하였다.
요(遼) 나라는 본디 선비(鮮卑)의 땅으로 요(遼) 일대의 늪지대에서 살았는데 유관(楡關 산해관(山海關))까지 1천 1백 30리였다. 개척한 땅이 점점 넓어져 5경(京) 6부(府)에 1백 56개의 주(州)ㆍ군(軍)ㆍ성(城)과 2백 9현(縣), 그리고 52부족(部族)과 60속국(屬國)을 두었으며, 옛 유주(幽州)ㆍ병주(幷州)의 땅을 포괄하여 동으로는 바다에 서로는 유사(流沙)에 북으로는 여구하(臚朐河)에 남으로는 백구(白溝)에 닿아 폭과 둘레가 만 리나 되었다.
상경(上京)은 임황부(臨潢府)로 본래 한(漢)의 요동군 서안평(遼東郡西安平)인데, 요의 큰 도읍지로 뒤는 산, 앞은 바다로 농사짓고 목축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동경은 요양부(遼陽府), 중경은 대정부(大定府), 남경은 석진부(析津府), 서경은 대동부(大同府)이며 모든 주현(州縣)은 5경(京)에 분할하여 예속되게 하였다. 왕의 평상 거처에 궁위(宮衛)를 두는 것을 알노타(斡魯朶)라 하고, 행차 때 행궁(行宮)을 두는 것을 날발(捺鉢)이라 하며, 국경지대의 진지를 분할한 것을 부족(部族)이라 하였다.
일이 생기면 침공하고 싸우고 한가하면 사냥하고 고기를 잡았는데, 그들의 왕이 가끔 춘수(春水)와 추산(秋山) 그리고 대막(大漠) 사이에 행차하여 유람하였다. 그 지방은 심한 추위와 바람 때문에 수시로 옮겨다니면서 수레와 말을 집으로 삼아 가을과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고 봄과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였다. 주민들의 나이 15세 이상 50세 이하를 군대에 예속되게 하였는데 늘 정규군 1명에 말 3필과 타초곡(打草穀)이 따랐으며, 군영을 지킬 적에는 집에서 부리는 장정을 각각 한 사람씩 배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마다 쇠갑옷, 말등에 덮는 방석ㆍ고삐, 말의 갑옷, 활 4개ㆍ화살 4백 개ㆍ길고 짧은 창ㆍ홀타(𨪷𨦃)ㆍ작은 도끼ㆍ큰 도끼ㆍ작은 기(旗)ㆍ쇠몽둥이ㆍ송곳ㆍ화도석(火刀石)ㆍ말구유ㆍ사탕 1말ㆍ사탕자루ㆍ탑모산(搭傘) 각 1개, 말을 매는 끈 2백 척(尺)을 모두 각자 구비토록 하였다. 사람과 말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지 않고 날마다 타초곡을 사방에 내보내어 노략질하여 제공토록 하였다. 그리고 사납고 모진 사람 1백 명 이상을 선발하여 멀리 정탐군으로 삼아 선봉의 앞 뒤 20여 리의 간격으로 배치하여, 밤중에 10리나 5리쯤 행군하다가 조금씩 머물면서 말에서 내려 귀를 기울여 사람과 말의 소리를 들어보고 들리면 그들을 사로잡고, 힘으로 상대하지 못할 적에는 선봉에서 급히 연락하였다. 군대 병력은 1백 6십 4만 2천 8백 명으로 궁궐 호위병과 부족 등의 군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관리는 남북으로 나누었는데 본국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漢)의 제도로는 한 나라 사람들을 대우하게 하였다. 아보기가 질랄(迭剌)과 이리근(夷離菫)을 분할시켜 남북 두 대왕(大王)을 삼았는데 그것을 북남원(北南院)이라 하였다.
북추밀은 병부(兵部)를, 남추밀은 이부(夷部)를, 북남 두 왕은 호부(戶部)를, 이리필(夷離畢)은 형부(刑部)를, 선휘(宣徽)는 공부(工部)를, 적렬마도(敵烈麻都)는 예부(禮部)를 관장하였으며, 북남부(北南府)의 재상이 통솔했는데, 북쪽은 황족(皇族) 4장(帳)이며 남쪽은 국구(國舅) 5장(帳)인데 대대로 그들을 선발하는 데 참여하게 하였다.
척은(惕隱)은 종족(宗族)을 통치하고 임아(林牙)는 외교문서와 보고문서를 편수하였으며, 우월(于越)은 가만히 앉아 공사(公師 삼공)의 상징으로 논의하였다. 태자(太子)ㆍ친왕(親王)이 군사상의 정무를 총괄하게 되면 그것을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라 하였으며, 대원수(大元帥)ㆍ도원수(都元帥)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남북에 좌우피실군(左右皮室軍)과 황피실군(黃皮室軍)이 있었는데 모두 정예의 군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천지(天地) 신(神)을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제산의(祭山儀)라 하며, 가물 때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는 것을 슬슬의(瑟瑟儀)라 하며, 또 사유의(射柳儀)와 시책의(柴冊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풍속에 12세만 되면 꼭 한 차례 재생의(再生儀)를 시행하였는데 그것을 부탄(覆誕)이라고도 하였으며, 어머니의 산실(産室)을 마치 처음 태어날 때처럼 설치하여 어머니의 수고롭고 애쓴 은혜를 간직하게 하였으며, 이 의식은 왕과 왕후ㆍ태자 그리고 이리근(夷離菫)만이 행사하게 하였다.
그들의 음악을 아악(雅樂)과 이적(夷狄)의 악(樂)을 섰었으며 그들의 왕과 남반(南班)의 한관(漢官)들은 한(漢) 나라의 복장을 사용하였었고, 왕후와 북반(北班)의 요(遼) 나라 사람들은 본국의 복제를 사용하였는데 본국의 복장 제도로는 관료들은 관복에다 모전(毛氈)으로 만든 관(冠)을 쓰고 금으로 만든 꽃을 꽂았으며, 혹 주옥(珠玉)과 물총새의 깃을 꽂기도 하였다. 이마 옆에 금으로 만든 꽃을 드리우고 배를 짜서 좁은 띠를 만들었으며 머리는 가운데로 모아 한 타래로 만들었다. 그리고 혹 깁으로 관(冠)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는데 그 모양은 오사모(烏紗帽)와 같았으나 차양(遮陽)은 없고 양쪽 귀를 누르지 않게 하였으며, 이마 위에는 금으로 만든 꽃을 꽂아 위에 있는 붉은 댕기에 묶어 그 끝에는 구슬을 달았다.
그리고 붉고 소매가 좁은 도포를 입고 점첩대(䩞鞢帶)를 매었는데 황록색이고, 금옥(金玉)ㆍ수정(水晶)ㆍ정석(靛石)으로 장식하였다. 그들 왕의 공복(公服)은 붉고 검은 두건과 붉고 소매가 좁은 도포를 입고 띠를 둘렀으며, 관료들도 두건에다 붉은 옷을 입었는데 그들의 평상시 복장은 주로 붉고 파란 색깔이며, 군복은 모두 옷깃이 왼편으로 되었는데 검고 푸른 색깔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형벌은 4가지가 있었는데 사형ㆍ귀양ㆍ징역ㆍ곤장이며, 또 경자(黥刺 얼굴에 먹물을 넣는 형벌)ㆍ목검(木劒)ㆍ대봉(大棒)ㆍ철골타(鐵骨朶)ㆍ채찍ㆍ지지는 형법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아보기(阿保機) 부자(父子)가 백 번 싸워 이기는 형세를 틈타 새로운 나라를 일으켰으니 그 웅장한 지모(智謀)와 큰 계략(計略)은 원대하다 하겠다.
올욕(兀欲)의 중인(中人) 자질과 술률(述律)의 잔인하고 포악함 때문에 연거푸 시해와 반역을 당하였으나 그들의 창업 기반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역대의 권위와 명령이 오히려 흡족하게 그 나라 사람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융서(隆緖) 때부터 거듭 이웃 나라와 화친을 굳게 하여 나라 안팎이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였으니 어찌 그렇게 성대하였는가?
연희 때 와서 간사한 무리들의 말을 높이 신용해서 자신이 국가의 기틀을 망쳤다. 금 나라 군대가 한 번 쳐들어 오려 하자 나라 안에서 반란이 먼저 일어나 왕을 폐하고 세우는 모략과 배반하고 도망하는 자취가 끊이지 않고 벌떼같이 일어나서 끝내 회복시켜 부지하지를 못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순(淳)과 아리(雅里)가 말한 ‘명분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을 완성시키지 못한다.’고 한 것과 대석(大石)이 억지로 연장시켜 보려고 한 것이 그중 나은 것이지만 얼마나 더 낫겠는가?
ⓒ 한국고전번역원 | 조명근 (역) | 1979
宋史筌遼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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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璟。小字述律。德光長子。母蕭氏。其先卽鮮卑。爲慕容氏所破。析爲三部。契丹其一也。唐以後。其酋長號大賀氏。後更遙輦氏。有楷落者。始稱王。至欽德。是爲痕德堇可汗。光啓中。數與劉仁恭戰。後漸衰弱。迭剌部長。涅里之後。夷离堇阿保機。盡有契丹諸部。夷离堇者。統軍馬大官之號也。遙輦氏遂亡。阿保機更名億。小字啜里。只號世里氏。世里者。耶律也。母蕭氏。a257_328a天祐丁卯。稱帝。後唐天成丙戌殂。年五十五。僭位二十年。改元曰神冊。曰天贊。曰天顯。謚神烈天皇帝。廟號太祖。墓號祖陵。第二子德光立。德光。小字堯骨。母蕭氏。淸泰丙申冊立。石敬瑭爲晉帝。晉天福戊戌。晉割與幽薊等十六州。開運丙午。滅晉。改國號曰大遼。殂年四十六。僭位二十一年。改元曰會同曰大同。謚惠文皇帝。廟號太宗。墓號懷陵。兄子阮立。阮。小字兀欲人。皇王倍長子。母蕭氏。周廣順辛亥。察割弑之。年三十四。僭位五年。改元天祿。謚莊憲皇帝。廟號世宗。墓號顯陵。事具唐五代史。阮旣遇害。璟以壽安王。卽a257_328b位。朝會用漢禮。建隆元年。王師圍北漢石州。璟遣阿剌援之。乾德二年。曹彬圍石州。璟遣撻烈援之。彬擊走之。開寶二年。近侍小哥等。乘璟沈醉。弑于懷州。璟耽酒好畋獵。嗜殺。至臠肉剉屍。刑政紊亂。國人怨畔。年三十九。僭位十九年。改元應曆。謚敬正皇帝。廟號穆宗。附葬懷陵。第二子賢立。賢字賢寧。小字明扆。母蕭氏。甫四歲。遇察割之難。璟養爲子。及璟被弑。帥甲騎。赴懷州卽位。納尙書令蕭守興女燕燕爲后。賢嬰風疾。燕燕决國事。帝親征漢北。賢遣兵救之。何繼筠。逆擊大破之。六年。始獲逆黨小哥等。誅之。七年。帝a257_328c始遣詔使。賢遣耶律昌。入朝。自是。每歲通使。以沙門昭敏。爲僧尼都揔管加兼侍中。八年。涿州刺史耶律琮。貽書知䧺州孫全興求和。帝命許之。賢遣使結成。太平興國四年。帝命潘美等。征北漢。賢遣使。問興師之故。帝曰。河東逆命。所當問罪。若北朝不援。和約如故。不然。惟有戰。帝親征北漢。次鎭州。賢遣耶律沙等。赴援。戰不利。死傷甚衆。帝受北漢主劉繼元之降。欲取幽薊。遂進圍南京。賢遣耶律休哥。救之。王師敗績。帝乘驢車走。賢遣韓匡嗣。冦鎭州。都鈐轄,劉廷翰等大破之。南院樞密使郭襲。諫畋獵。嘉納之。五年。蕭咄李a257_328d等冦鴈門。代州刺史楊業大破之。賢親帥兵入冦。圍瓦橋關。休哥渡水而戰。王師大敗。帝自將禦之。賢引兵還。以休哥爲于越。于越者。至貴之職也。休哥智略宏遠。戒戎兵。無輕犯宋境。六年。上京漢軍。劫立喜隱。子留禮壽留守除室擒之後。幷誅喜隱。喜隱卽賢之宗族。謀叛而見囚者也。七年。賢冦滿城敗還。殂于焦山。賢任人不疑。信賞必罰。肰竭力助漢。破軍殺將。年三十五。僭位十四年。改元曰保寧曰乾亨。謚康靖皇帝。廟號景宗。墓號乾陵。長子隆緖立。隆緖。小字文殊奴。母蕭氏。初封梁王。工書畫音律。能詩善射。卽位。a257_329a年二十。蕭后聽政。八年。復國號曰契丹。遣蒲領等。侵高麗。諭三京諸道。有父母在。別籍異居者。聽隣里覺察坐之。孝子及三世同居者。㫌門閭。勑諸刑辟已結定決有寃者。詣㙜訴。雍煕二年。以高麗道路沮洳。諭先伐女眞。三年。西夏李繼遷來附。以爲定難節度使。帝命曹彬等。將兵出鴈門。隆緖親帥兵禦之。先遣休哥等。屢戰大破之。隆緖乘勝薄代州。張齊賢擊却之。端拱元年。隆緖連陷滿城諸郡。初置貢擧。二年。諫議大夫馬得臣諫擊毬。嘉納之。耶律休哥入冦。廵檢使尹繼倫擊之于唐州。休哥中箭而遁。自是。不敢大入a257_329b冦。淳和元年。封李繼遷爲夏國王。二年。定難軍節度使李繼捧來附。封西平王。李繼遷叛隆緖歸降。三年。遣蕭德恒等。侵高麗。四年。高麗王王治。奉表請罪。割女眞鴨綠江東地數百里與之。五年。始行大明曆。賈俊所進也。帝遣使求和。不報。諭郡邑。貢明經茂材異等。高麗送女樂。不受。禁遊食民。至道元年。韓德威誘党項勒浪等族。自振武入冦。折御卿。敗之于子河汊。高麗遣童子十人。來學契丹語。二年。高麗請婚。以蕭德恒女嫁之。三年。勸品部富民。出錢贍貧民。獵于平地松林。母蕭氏誡曰。前聖有言。欲不可縱吾兒。爲天a257_329c下主馳聘田獵。萬一有銜橛之變。適遺余憂。其深戒之。咸平二年。隆緖大擧入冦。圍遂城。守將楊延紹。固守。遂引去。掠諸州。帝親禦之。次州。三年。隆緖知帝親征。乃縱掠而去。范廷召等追擊。大破于莫州。四年。隆緖入冦三路。都部署王顯。戰于遂城。斬首二萬餘級。六年。耶律奴瓜等。冦定州。擒副都部署王繼忠。景德元年。隆緖與其母蕭氏。統軍。蕭撻覽大擧入冦。圍州。撻覽中弩死。帝親征。次州。御北城門。初降將王繼忠。爲隆緖言和好之利。密表聞于朝。詔諭繼忠。因遣曹利用。詣隆緖營。隆緖使韓杞與利用。俱來請a257_329d盟。利用言隆緖欲關南地。帝曰。歸地無名。如必邀求。朕當決戰。若欲金帛固無傷。復遣利用。以銀十萬兩。絹二十萬匹。成約而還。隆緖遣使。以誓書來。兄事帝。自是。諭幣通使。歲以爲常。大中祥符二年。隆緖母蕭氏殂。蕭氏有機謀。善馭大臣。每入冦。被甲督戰。及通好。亦出其謀。肰性殘忍。多殺戮。三年。高麗康兆弑其君誦。擅立誦兄詢。隆緖自將擊之。擒康兆銅霍等。州皆降。詢遣使請朝。許之。以馬保佑。爲開城留守。高麗守將卓思正。殺使者韓喜孫等。逐保佑。隆緖遣蕭排押等。攻開城。詢棄城遁。遂焚開京。引兵還。諸降城復a257_330a歸高麗。五年。高麗遣蔡忠順。乞稱臣。隆緖命詢親朝。詢以疾爲辭。先是。以鴨綠江北。予高麗。高麗築六城。曰興,鐵,通,龍,龜,郭州。至是怒詢不朝。復諭還六州。設學歸州。敎其民。本新羅所遷者。未習文字故也。七年。連歲遣耶律資忠。使高麗。取六州。高麗不從。遣蕭敵烈擊之。高麗與女眞。大破之。九年。耶律世良等。與高麗戰于郭州。大破而還。天禧元年。禁命婦再醮。遣蕭合卓等。侵高麗。二年。蕭排押等。與高麗。戰于茶陀二河。大敗。三年。遣郞君曷不式等。帥大軍侵高麗。高麗王詢。遣使請納方物。許之。四年。高麗表請稱藩。歸所a257_330b留只剌里。只剌里在高麗。六年不屈。特拜林牙。林牙者。翰林也。乾興元年。帝崩。隆緖集蕃漢大臣。擧哀。遣使吊祭。置帝御靈。建資福道塲百日。諭國內。不得作樂。犯帝諱者。悉改之。天聖五年。諭諸帳院庶孽。竝從其母論貴賤。六年。禁庶孽。雖已爲良。不得預世選。諭兩國舅及南北王府。乃國之貴族。賤庶不得任本部官。七年。詳穩大延琳叛。囚東京留守蕭孝先。建國號興遼。隆緖遣蕭孝穆討之。延琳尋被執。九年。隆緖殂于大福河。隆緖遭母喪。哀毁骨立。羣臣請改元。隆緖曰改元吉禮。居喪行吉禮。不孝。群臣請以日易月。法a257_330c古制。曰吾契丹帝也。寧違古制。不可爲不孝之子。疾革。謂子宗眞曰。宋朝信誓。當守而勿失。年六十一。僭位四十九年。改元曰統和曰開泰曰太平。謚文武大孝宣皇帝。廟號聖宗。墓號慶陵。長子宗眞立。宗眞。字夷不堇。母元妃蕭氏。初封梁王。善騎射。好儒術。蕭氏名耨斤。齊天皇后蕭氏無子。取其子宗眞養之。愛同己子。至是。耨斤自立爲皇太后。聽政。隆緖將殂。屬宗眞曰。皇后事我四十年。以其無子。命汝爲嗣。汝子母切勿殺之。及殂。左右希耨斤旨。誣齊天后弟謀逆。耨斤鞠治。連及齊天后。宗眞曰。撫育朕躬。當爲太后。a257_330d今反罪之可乎。耨斤遂遷之上京。明道元年。耨斤乘宗眞遊雪林。遣人至上京。弑齊天后。景祐元年。耨斤陰召諸弟。議立少子重元。重元以謀告宗眞。宗眞遂收耨斤符璽。處之慶州。始親政。以重元爲皇太弟。四年。迎其母耨斤于慶州。康定元年。宗眞欲入冦。北院樞密使蕭孝穆上書切諫。不報。孝穆廉謹有禮法。嘗曰。樞密選賢。何事不濟。若自親煩碎。大事凝滯。不能移風易俗。偸安爵位。非臣子也。時稱爲寶臣。慶曆二年。遣蕭特末等。來求關南之地。時國內無事。慨肰有南侵之意。問興師伐夏及增益兵戍之故。帝遣富弼。a257_331a問求割地。宗眞曰。南朝違約。塞鴈門籍民兵。羣臣。勸擧兵而南。吾謂求地不獲。擧兵未晩。弼反覆陳其不可。還具以聞。復使弼。持和親,增幣二議來。宗眞留增幣誓書。使耶律仁先等。與弼偕來。議歲增錢絹各十萬兩匹。帝遣正朝,壽節二使。在邸。宗眞。微服往觀。四年。初修國史。命耶律谷欲,耶律庶成等。充史官。初宗眞伐党項。夏主元昊救之。至是。徵諸道兵。將親伐。元昊遣使來告曰。爲中國討賊。愼無和也。遣宗元等。伐元昊。元昊迎戰敗之。已而歸其俘獲。宗眞遂引兵還。以雲州。爲西京。六年。諭林牙蕭韓家奴。撰禮書。七年。a257_331b定公主行婦禮於舅姑儀。皇祐元年。宗眞自將伐夏。耶律敵魯古。至賀蘭山。獲元昊妻以歸。有弟從兄爲強盜者。俱無子。特原其弟。二年。加僧惠鑑檢校太尉。三年。安置元昊妻于薊州。四年。與夏平。宗眞諭大臣曰。朕與宋主。約爲兄弟。欲見其繪像。可諭來使。至和元年。令八房族。加巾幘。二年。遣使賀乾元節。献本國三世畫像。求御容。召宋使釣魚賦詩。如秋山不豫。召燕趙國王洪基。諭以治國之要。縱五坊鷹鶻。焚釣魚之具而殂。宗眞性佻侻。嘗因夜宴。自入樂隊。又數變服入酒肆寺觀。尤重浮屠。肰親策進士。大修條制。下a257_331c至士庶。得陳便宜。求治之志切矣。年四十。僭位二十四年。改元曰景福曰重煕。謚神聖孝章皇帝。廟號興宗。墓號慶陵。長子洪基立。洪基字涅隣。小字査剌。母蕭氏。初封梁王。進封燕趙國王。性沈靜嚴毅。每朝。宗眞爲之斂容。宗眞殂。哀慟不聽政。百僚固請。許之。諭曰。朕以菲德。託居士民之上。第恐智識有不及。羣下有未信。賦斂妄興。賞罰不中。凡爾士庶。直言無諱。諭非勳戚後及夷离堇副使承應諸職事人。不得冠巾。以重元。爲皇太叔。免漢拜不名。諭左夷离畢曰。朕夙夜憂懼。恐不克任。欲聞直言。以匡其失。今已數月。a257_331d未見所以副朕委任股肱耳目之意。其令內外百官。各言一事。無貴賤老幼。皆得直言無諱。設學養士。頒五經傳䟽。置博士助敎。嘉祐二年。初宗眞請得御容。會殂乃已。至是。洪基献其像。因求御容。帝使胡宿奉御容報之。洪基具儀仗迎謁瞻視。驚肅再拜曰。我若生中國。不過與之執鞭持盖。一都虞候耳。五年。監修國史耶律白。請編次其主詩賦。仍命白爲序。七年。東京留守蕭河剌。性忠直。有經濟才。陳時政得失。洪基怒殺之。八年。皇太叔重元。與北院樞密使蕭胡覩等。誘弩手軍。犯太子山行宮。南院樞密使仁先等。卛兵a257_332a禦之。洪基母蕭氏。親督衛士。殺重元子涅魯古。族逆黨家。重元亡入大漠自殺。治平元年。禁南京民決水種粳稻。禁民私刊印文字。命求乾文閣所闕經籍。付儒臣校讐。洪基遊毉巫閭山。母蕭氏。射獲虎。大宴羣臣。令各賦詩。三年。復改國號曰遼。煕寧元年。令南京除軍行地。餘皆種稻。三年。設賢良科。令應是科者。先以所業十萬言進。以馬希白詩才敏妙。十吏書不能給。召試之。四年。禁布帛短狹不中尺度者。置佛骨于招仙浮圖。罷獵。禁屠殺。五年。慶州鄞文高八世同居。賜爵。大雪。許民樵採禁地。八年。帝遣沈括定界。洪基a257_332b后蕭氏。艶恣容。工詩好音樂。生太子濬。時北院樞密使耶律乙辛專政。忌后明敏。於是。宮婢單登等。誣后與伶官趙惟一私。乙辛以聞。遂族誅惟一。賜后自盡。九年。洪基欲觀起居注。修注郞不攧及忽突堇等。不進。各杖罷之。十年。乙辛弑太子濬。濬好學善騎射。時乙辛旣搆害濬母。立其黨蕭霞抹妹爲后。又欲害濬。護衛蕭忽古。知其狀。欲殺乙辛。事覺下獄。乙辛令蕭訛都斡等。誣告忽古等謀殺乙辛。立濬爲帝。於是。廢濬爲庶人。徙上京。大殺株連諸臣。乙辛遣人殺濬。詐云疾卒。復殺濬妃。洪基後知其寃。追謚昭懷太子。元a257_332c豊元年。諸路奏飯僧尼三十六萬。三年。濬子延禧。生甫六歲。乙辛又欲害之。因言宋魏王和魯斡子淳。可爲儲嗣。和魯幹。卽洪基弟也。北院宣徽使蕭兀納等。諫曰。舍嫡不立。是以國與人。洪基疑不决。獵于黑山。見扈從官屬多隨乙辛後。始惡其專。出之興中府。盡黜其黨。後囚乙辛于萊州。遂封延禧爲梁王。四年。如駙馬蕭酬斡第飮。宰相梁穎諫曰。天子不可飮人臣家。卽還宮。五年。行秬黍所定升斗。降后蕭氏爲惠妃。其母燕國夫人厭魅延禧。伏誅。貶妃爲庶人。幽于宜州。六年。乙辛謀亡入宋。伏誅。使僧善知讐校高麗所a257_332d送佛經。頒行。元祐元年。召權翰林學士趙孝嚴,知制誥王師儒等。講五經大義。四年。諭學者當明道窮經。七年。生女眞部節度使劾里鉢疾篤。謂其弟盈哥曰。辦集契丹事。惟第二子阿骨打能之。遂死。劾里鉢嚴重多智。變弱爲強。基業始大。紹聖三年。洗馬劉輝上書曰。歐陽脩五代史。附我朝於四夷。妄加貶訾。且宋賴我許通和好。得盡兄弟之禮。今反令臣下。妄意作史。恬不經意。臣請以趙氏初起事蹟。詳附國史。嘉納之。遷禮部郞中。四年。夏人來告宋城要地。洪基遣使。請與夏和。元符三年。以有司案牘。書宋帝嗣位。爲登a257_333a寶位。奪宰相鄭顓以下官。建中靖國元年。洪基殂于混同江。洪基初卽位。求直言訪治道。及夫群邪竝興。不保骨肉。諸部反側。甲兵之用。無寧歲矣。年七十。僭位四十七年。改元曰淸寧曰咸雍曰太康曰大安曰壽隆。謚仁聖大孝文皇帝。廟號道宗。墓號慶陵。孫延禧立。延禧字延寧。小字阿果。濬子。母蕭氏。初封梁王。進封燕國王。卽位。始服斬衰。命爲乙辛所誣陷者。復其官。籍沒者出之。流放者還之。尊其考妣爲帝后。生女眞部節度使盈哥死。傳于兄子烏雅束。烏雅束死。其弟阿骨打襲。崇寧元年。誅乙辛黨。徙其子孫于a257_333b邊。剖乙辛之棺。以其家屬。分賜被殺之家。四年。延禧微行。視民疾苦。遣使請勿伐夏。帝遣翰林學士林攄報之。政和元年。帝遣端明殿學士鄭允中。䆠者童貫爲副。初林攄還言。遼國中携離可伐。帝始有北伐之意。至是。遣貫等覘之也。馬植仕延禧。爲光祿卿。潛見貫進滅遼之策。貫携歸。改姓名李良嗣。帝賜姓趙氏。二年。延禧如混同江。女眞酋長皆來朝。與頭魚宴。酒半酣。延禧命諸酋起舞。惟阿骨打辭不能。諭之再三。竟不從。他日。延禧密諭北院樞密使蕭奉先。託邊事誅之。否則必貽後患。奉先以爲彼不知禮。無大過而a257_333c殺之。恐傷向化心。延禧乃止。阿骨打疑延禧知其異志。且以其淫酗。不恤國政。遂稱病屢召不復至。四年初。女眞起兵。以紇石烈部人阿疎不從。討之。阿踈來奔。至是。阿骨打遣人索阿踈。終不許。阿骨打遂集諸部兵。以銀朮可等。爲將。數遼之罪。告于天地。進攻寧江州。延禧遣司空蕭嗣先等。禦之。阿骨打連戰大破之。遼人嘗言女眞兵滿萬。則不可敵。至是始滿萬云。五年。阿骨打稱帝。國號金。延禧遣使于金。議和。阿骨打大擧來侵。與幹里朶等戰。敗之于達魯古城。延禧復遣使。諭速降。阿骨打報書。亦諭延禧降。延禧親帥a257_333d兵伐之。以御營都統奉先等。爲先鋒。耶律章奴。副之。章奴叛奔上京。謀迎立宗室淳。遣蕭諦里說之。淳斬諦里以獻。於是。章奴犯廣平淀行宮。因奔女眞。爲邏者所獲。送行在。腰斬。延禧至駞門。蕭特末等。將騎步兵四十五萬。至斡隣濼。會延禧以章奴叛西還。阿骨打追擊大破之。都監耶律張家奴叛。六年。東京軍亂。殺留守蕭保先。保先裨將高永昌。據遼陽。僭號建元。延禧遣蕭韓家奴。討之。張家奴陷高州。延禧親討平之。阿骨打攻殺高永昌。盡取東京州縣。七年。延禧如陰凉河。募遼東人爲兵。使報怨女眞。號曰怨軍。凡入營a257_334a屯衛州蒺藜山。金人攻破蒺藜山。遂拔顯州。乾懿等七州。皆降。鉄州人楊朴。說阿骨打。自古英䧺開國。必先求大國封冊。遂遣使議和。求封冊。重和元年。帝遣武義大夫馬政。至金通好議。共伐遼。延禧遣使如金議和。阿骨打復書。請以兄事金。歲貢方物。宣和元年。阿骨打遣使貢方物。帝諭以夾攻遼。少宰王黼。薦畫學正陳堯臣使遼。堯臣繪延禧像以歸。言於帝曰。論以相法。亡在朝夕。幷圖其山川險易以上。延禧遣使。冊阿骨打爲東懷國皇帝。先是。凡七遣使如金。議冊禮。金遣使迎冊。冊至以無兄事之語。又不稱大金而a257_334b東懷。乃小邦懷其德之意。責其乖禮。不受。二年。先是。延禧遣使持冊藁如金。金遣使持冊副本。報之延禧。以金所定大聖二字。犯先世稱號。遣使往議。阿骨打怒絶之。遂自將攻上京。留守撻不也出降。帝遣使如金。約共攻遼。三年。延禧四子。長趙王習泥烈。次晉王敖盧斡。秦王定。許王寧。時女眞興兵。延禧畋遊。晉王母文妃蕭氏。作歌諷諫。樞密使蕭奉先。元妃之兄。而秦許二王之舅也。以晉王有人望。恐秦王不得立。潛圖之。文妃姊適耶律撻曷里。妹適耶律余覩。奉先誣文妃與駙馬蕭昱及余覩撻曷里等。謀立秦王。延禧a257_334c遂殺昱撻曷里及文妃。時余覩在軍中。大懼降于金。阿骨打以余覩爲嚮導。趨中京。四年。余覩引婁宿奄至。延禧憂甚。奉先曰。余覩此來。欲立甥晉王耳。若誅晉王。余覩自回矣。會耶律撒八等。謀立晉王。事覺。延禧遂殺晉王。由是人心解軆。金兵逼鴛鴦濼行宮。延禧走雲中。粘沒喝追之。延禧入夾山。始悟奉先之不忠。怒曰。其勿從行。奉先拜去。爲其下所執。縛送金軍。延禧復獲而誅之。初延禧之走雲中也。留南部宰相張琳,參知政事李處溫。與秦晉國王淳。守燕京。至是處溫與大臣耶律大石等。擁立淳。建元天福。世稱北a257_334d遼。遙降延禧。爲湘陰王。金人來約夾攻遼。帝命童貫爲河北河東路宣撫使。以應之。金人取西京。沙漠以南部族皆降。延禧遁于訛莎烈。延禧遣使來言于童貫曰。女眞之叛。亦南朝之所惡也。棄百年之好。基他日之禍。可乎。救災恤隣。古今通義。惟大國圖之。貫不能對。淳寢疾。聞延禧傳檄天德等州。甚憂之。召大臣議。處溫等。有迎秦王據湘陰之說。耶律寧曰。秦,湘。父子也。安有迎子而拒父。處溫欲殺寧。淳曰。忠臣不可殺。已而。淳死。衆乃立淳妻蕭氏爲皇太后。遙立延禧次子秦王定爲帝。建元德興。謚淳爲孝章皇帝。處溫a257_335a懼禍。欲南通宋。北通金。以爲內應。后執而誅之。阿骨打追及延禧于石輦驛。延禧遁于落昆膸。郭藥師以涿易二州。來降。童貫受之。阿骨打入燕京。蕭后奔天德軍。五年。北院樞密使奚王回离保自立爲奚國皇帝。後爲其下所殺。延禧聞南京破。出奔西部族。蕭后來見。延禧怒殺之。追降淳爲庶人。金斡离不等。至居庸關。擒耶律大石。使爲嚮導。襲延禧于應州。秦許二王及諸妃公主從臣。皆被執。特母哥。竊延禧次子雅里。赴延禧軍。延禧遁雲內。夏主李乾順遣使。請延禧臨其國。蕭特烈諫不聽。遂次于金肅軍北。特烈等劫雅a257_335b里。走西北部。立爲帝。建元神曆。初張瑴領平州事。練兵爲備。金人陞平州爲南京。加瑴平章判留守事。至是。金人驅所俘宰相左企弓等。同燕京富民東徙過平州。瑴諸將皆曰。公若仗義勤王。以圖興復。先誅企弓等盡返燕民。以平州歸宋。遂爲藩鎭。又何懼焉。瑴遂誅企弓等。畫延禧像。朝夕謁告行事。已而。請降。帝命厚加安撫。後爲斡离不所敗。帝命殺之。凾首與金。初金人陷燕京。蕭斡就奚王府。自立爲神聖皇帝。連陷景州薊州。尋爲其下所殺。金主阿骨打死。弟吳乞買嗣。大石自金還。延禧釋之。延禧還居突呂不部雅a257_335c里死。蕭特烈等。復立宗眞孫求烈。後爲亂兵所殺。六年。延禧至馬哥軍。金人襲之。延禧遁烏敵烈部。再謀出兵。大石力諫。不聽。大石遂自立爲王。延禧與金人戰。敗走山陰。七年。党項小斛祿。請延禧臨其地。至天德。遇雪絶粮。朮者進麨與棗。延禧欲憇。朮者輒跪坐以倚之。夜宿民家。紿曰偵騎。其家知之。乃叩馬首。跪而大慟。居數日。延禧嘉其忠。授節度使。至應州。爲金將婁宿所獲。後降封海濱王。以疾殂。年五十四。僭位二十四年。改元曰乾統曰天慶曰保大。自號天祚皇帝。金改封豫王。葬于閭陽乾陵旁。耶律大石。字重a257_335d德。阿保機八世孫。登進士第。擢斡林應奉。爲遼興軍節度使。延禧播越。大石擁立秦晉王淳。淳死。延禧責大石而釋之。大石諫延禧勿與金戰。不聽。於是。遂殺樞密蕭乙薛。自立爲王。西走至可敦城。靖康元年。回鶻王畢勒哥迎之。因送至境外。兵行萬里。至起兒漫稱帝。是爲西遼。二年。東歸。建都虎思斡耳朶。紹興六年殂。年五十。僭位十二年。改元曰延慶。曰康國。廟號德宗。子夷列年幼。妻蕭氏稱制。名塔不煙。號感天皇后。十二年殂。攝位七年。改元咸淸。夷列立。二十四年殂。僭位十三年。改元紹興。廟號仁宗。子幼。遺命妹普a257_336a速完稱制。號承天太后。後與駙馬蕭朶魯不弟朴古只沙里通。因殺其駙馬。乾道四年。駙馬父斡里剌。射殺普速完。攝位十五年。改元崇福。夷列次子直魯古立。嘉泰元年。出獵。乃蠻王屈出律。伏兵擒之。據其位。尊直魯古爲太上皇。尋殂。僭位三十四年。改元天禧。遼亡。遼國本鮮卑之地。居遼澤中。去楡關一千一百三十里。拓地浸廣。有京五府六州。軍城百五十有六。縣二百有九。部族五十有二。屬國六十。包括古幽幷之地。東至海西至流沙。北至臚胊河。南至白溝。幅員萬里。上京臨潢府。本漢遼東郡西安平。遼之大都a257_336b也。負山抱海。宜耕植畜牧。東京卽遼陽。中京卽大定。南京卽析津。西京卽大同。諸州縣分隸五京。居有宮衛。謂之斡魯朶。出有行宮。謂之捺鉢。分鎭邊圉。謂之部族。有事則攻戰。閒暇則畋漁。其主往往出遊。春水秋山。大漠之間。多寒多風。轉徙隨時。車馬爲家。秋冬違寒。春夏避暑。民年十五以上五十以下。隸兵籍每正軍一名。馬三匹。打草穀。守營舖。家丁各一人。人鐵甲,馬韉轡,馬甲,弓四,箭四百,長短鎗𨪷𨦃斧鉞,小旗,鎚錐,火刀石,馬盂粆一斤。粆袋,搭傘各一縻。馬繩二百尺。皆自備。人馬不給糧草。日遣打草穀。四出抄a257_336c掠以供之。選剽悍百人以上。爲遠探欄子軍。在先鋒前後二十餘里。夜中行十里。五里少駐。下馬側聽人馬之聲。有則擒之。力不可敵。飛報先鋒。有兵一百六十四萬二千八百。宮丁部族等軍。皆不與焉。宮分南北。以國制。治契丹。漢制。待漢人。阿保機分迭剌夷離堇。爲南北二大王。謂之北南院。北樞密兵部。南樞密吏部。北南二王戶部。夷離畢刑部。宣徽工部。敵烈麻都禮部。北南府宰相緫之。北則皇族四帳。南則國舅五帳。世預其選惕隱治宗族。林牙修文。誥于越坐而論議。以象公師太子。親王緫軍政曰。天下兵馬大元a257_336d帥。又有大元帥都元帥焉。有南北左右皮室及黃皮室。皆掌精兵。祭天地于木葉山曰祭山。天旱禱雨曰瑟瑟儀。又有射柳儀,柴冊儀。其俗每十二歲。必一次行再生儀。又名覆誕。設母室。若新生然。以思劬勞之恩。惟其主與后。太子夷离堇得行之。其樂參雅夷。其主與南班漢官。用漢服。其后與北班遼人。用國服。國服之制。臣僚朝服戴氊冠。金花爲飾。或加珠玉翠毛。額後垂金花。織成夾帶。中貯髮一緫。或紗冠。制如烏紗帽。無簷。不擫雙耳。額前綴金花。上結紫帶。末綴珠。服紫窄袍。繫䩞鞢帶。黃紅色。用金玉水晶。靛石綴飾。a257_337a其主公服。紫皁幅巾。紫窄袍。王束帶。臣僚亦幅巾紫衣。其常服多紅綠色。其戎裝。皆左袵。黑綠色。其刑有四。曰死,流,徒,杖。又有黥刺,木釰,大棒,鐵骨朶鞭,烙之法。
論曰。阿保機父子。乘百戰之勢。輯新造之邦。䧺謀大畧。可謂遠矣。雖以兀欲中才。述律殘㬥。連遘弑逆。而基業不隳。葢由歷世威令。猶足以震疊其國人也。隆緖以來。申固鄰好。四境乂安。何其盛歟。至于延禧。崇信姦回。自椓國本。金兵一集。內難先作。廢立之謀。叛亡之跡。相繼蠭起。不可復支。良可哀也。淳雅里所謂a257_337b名不正。事不成者。大石苟延。彼善於此。亦幾何哉。
庚午春比隣南少年應煥聲汝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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